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 누구도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어떻게 임종의 시간을 맞을 지, 심히 궁금하면서도 사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왜냐, 아직 죽음은 우리에게 오지 않았고, 그 때는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래도 불안한 것,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경우,
그것이 문제다.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현대인들만이 아니고
오래 전 이 땅을 살다가 간 철학자들도 그, 문제에 대해 수많은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매우 긴 노년을 얻는다 해도 죽음에 이를 때까지 무사히 보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돕지도 못한 채 쓰러져 자리에 누워 있다네.
그렇게 인생의 일부를 잃는 것이 인생을 끝낼 권리를 잃는 것보다 얼마나 더 잔인한 일이라고 그대는 생각하나?
내 말을 듣기 싫어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게.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닥쳐올 수 있는 문제라고 여기고, 내가 하는 말을 잘 생각해주기 바라네.
내가 노년을 버린다 해도, 그것은 나라는 인간이 나에게 모두 즉, 더 나은 부분이 모두 남겨 있을 동안은 아니네.
그러나 노년이 되어 정신이 타격을 받고 그 각 부분이 떨어져 나가,
나에게 남는 것은 인생이 아니라 단순히 숨을 쉬는 것뿐이 된다면 나는 뛰쳐나갈 것이네.
건물이 낡을 대로 낡아 무너지고 있는 거니까. 나는 병을 죽음으로 피하는 일은 하지 않겠네. 그것이 치유가 능하고 영혼의 방해가 되는 한은, 고통 때문에 자신의 몸에 폭력을 가하는 짓은 하지 않겠네. 그런 죽음은 패배이니까.
그래도 이 고통을 언제까지나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갈 것이네. 그것은 고통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되는 모든 것에 손이 닿지 않게 되기 때문이네.
고통 때문에 죽은 인간은 나약한 겁쟁이이지만, 고통을 받기 위해 사는 인간은 어리석은 바보라네.“
<세네카 인생론> 중 ‘삶을 생각하며 쓰는 편지’에 실린 글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세네카가 살았던 당시와는 다르지만 나이가 들고 치매가 닥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은 옛사람들이 택했던 고려장이나 진배없다.
가족들의 허락없이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철의 장막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시대의 명망가들도 자기의 육체를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 전, 자기의 삶을 스스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들뢰즈도 자살을 택했고,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은 의외로 많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족이나 사회에 짐이 되는 것, 그것 자체가 몸서리치도록 싫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느 날 건강하게 맑은 정신으로 살다가 문득 쓰러져 이 세상을 작별하는 것,
먼데 가는 것도 아니고 이웃 마을에 마실을 가듯,
그렇게 떠난다면 그것이 최상의 이 지상과의 이별법이 아닐까?
“태어나지 않았을 것, 無이었어야 했을 것이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좋은 것이 있나니, 그것은 빨리 죽는 다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들의 말이 새삼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새벽이다.
길위의 인문학에서 퍼옴...
사진은 인터넷에서....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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