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수양**/퍼온 글

나를 위하는 것이 세상을 위하는 것

빈손 허명 2022. 12. 16. 13:19

나를 위하는 것이 세상을 위하는 것?

 

누가 누구를 위한다는 것 자체가 실상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그 개개인이 이 우주 속에 하나의 작은 우주, 독립된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게는 무한한 천체 속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공감대로서 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다는 의미 내지는 예의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나를 위하면서도 더 넓은 의미에서 세상을 위하며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자기를 위하는 것이(爲己) 바로 남을 위하는 (爲人)것으로, 자기를 위하는 것이 타인을 위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이 중국의 사상가인 이탁오의 사상이었다. 그는 그 당시 중국 사회가 개인을 억압하고 말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끝내 자기를 너무 가볍게 보게 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탁오가 택한 스스로를 위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도 규칙에 맞는 경지처럼 수양하는 공자孔子의 경우와 다른 것이었다. 공자는 ’재물財物을 탐내지 않고, 색色을 좋아하지 않고, 권세權勢를 누리지 않고, 득실得失을 걱정하지 않고, 후세를 위하여 가산을 늘릴 궁리를 하지 않고, 풍수를 따라서 음복을 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자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를 위하는 것은 대도大道 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너무 높고 먼 것에 힘쓰기 때문에 세상의 실정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를 위하는 것이 바로 실용적으로 자신을 살피는 것이고 자신에게 절실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 속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생활의 천 가지 형태 중에서 각자는 하나밖에 알 수가 없거든, 남들의 평가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을 기쁘게만 할 필요가 있어. 되풀이 말하지만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거든.”

이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세상을 진일보시키기도 하고 돌이킬 수가 없는 세상과의 불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한 길 사람의 마음이고,

그 한 길 사람의 마음이 세상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떠들썩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