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의 세종대왕릉 영릉과 고달사지 일대를 걷다.
2023년 1월 말인 28일 토요일에 여주의 세종대왕과 효종대왕릉인 영릉과 고달사지, 명성왕후 생가와 파사산성 일대를 찾아갑니다.
“너의 불행과 나의 행복을 위하여.” 내 인생의 도반인 절친이 예전에 술잔을 부딪쳤을 때 했던 말이다. 나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도 있다. 엇갈리고 엇갈리는 삶이라서 어느 시기에, 어떤 순간에 인생길이 백팔십도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태종의 아들인 세자 양녕과 둘째 효령 그리고 셋째 아들인 충녕의 운명이 뒤바뀐 날이 1418년 6월 3일이었다. 세자 양녕을 폐하는 것에 대한 찬반이 분분하자 임금이 왕비에게 의견을 물었다.
임금이 내전으로 들어가서 여러 신하들의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청請을 왕비에게 말하니, 왕비가 불가한 것을 말하기를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됩니다” 하였다. 임금도 또한 이를 옳게 여겼으나, 한참 만에 곧 깨달아 말하기를 “금일의 일은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 (…)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의 복이 된다’라고 하였다.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6월 3일 임오)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고 두 달 후 왕위를 세자에게 넘겼다.
내가 재위在位한 지 지금 이미 18년이다. 비록 덕망은 없으나 불의한 일을 행하지는 않았는데, 능히 위로 천의에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번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충황蟲蝗의 재앙에 이르고, 또 묵은 병이 있어 근래 더욱 심하니 이에 세자에게 전위하려고 한다.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것은 천하 고금의 떳떳한 일이요, 신하들이 의논하여 간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태종실록》 권36, 태종 18년 8월 8일 을유)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실록에는 “왕세자가 내선을 받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다”(《태종실록》 권36, 태종 18년 8월 10일 정해)라고 적힌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 시대의 개막이었다.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북성산 기슭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을 두고 풍수가들은 이름 그대로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땅에 피는 아름다운 꽃, 즉 명당 중의 명당이라 부른다. 풍수지리가들은 영릉의 형국을 풍수지리가들은 모란꽃이 절반 정도 피어 있는 목단반개形牧丹半開, 봉황이 날개를 펴서 알을 품고 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용이 조산祖山을 돌아본다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도 한다. 그런 연유로 지관들은 “이 능의 덕으로 조선왕조의 국운이 100년 더 연장되었다” 말하기도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영릉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영릉은 우리나라 정헌대왕(세종)을 모신 곳이다. 개토開土할 때 옛 표석標石이 나왔는데, “마땅히 동방의 성인聖人을 장사할 곳이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술사들은 “용이 몸을 돌려 자룡으로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 중에서 으뜸이다”라고 말했다. (이중환, 《택리지》, <팔도총론>)
영릉은 본래 경기도 광주시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과 개포동 뒷산)에 있었다. 세종은 1446년 소헌왕후가 죽자 태종의 헌릉 서쪽 기슭에 영릉을 조성했다.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다. 그때 오른쪽을 세종의 수릉壽陵(생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능)으로 삼고, 왼쪽에 소헌옹후 심씨를 모셨다. 세종이 아버지 태종의 헌릉이 있는 대모산 중턱에 자신의 능침을 정한 것은 죽은 뒤에도 아버지의 곁에 있고자 하는 효심에서였다. 소헌왕후가 죽은 뒤 지관들은 아무래도 좋은 자리가 아니므로 다른 곳에 장사 지내자고 여러 차례 권했다. 하지만 세종의 생각은 확고했다. 결국 세종은 세상을 하직한 뒤 아내와 합장해서 그 자리에 잠들었다.
신정일의 <왕릉 가는 길> 중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사지 고달사지,
“북내면 상교리에 남한강변의 이름난 폐사지 고달사가 있다.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의 고달사高達寺는 혜목산 아래에 있다. 아늑하게 감싸인 지형이 큰 소쿠리 속에 있는 듯하다.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누가 창건했으며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추정하기로 이때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시기였고 남한강의 유리한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사원을 경영했을 때였으므로, 고달사를 신라시대 창건설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보다는 원종 이전 나말여초에 세력을 떨친 선종 계통의 절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이면서 고달선원으로 불리었는데 창원에서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회는 원감국사 현욱의 제자였고 진경대사는 원종대사에게 법통을 넘긴다.
김현준이 쓴 『이야기 불교사』에 "문성왕 2년(840년) 현욱선사는 거처를 여주 혜목산 고달사로 옮겼는데 사람들은 산 이름을 따와서 스님을 혜목산 화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선풍을 떨치다가 경문왕 9년에 입적하자 경문왕은 원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라고 적고 있다.
고달사를 중흥시킨 신라 말의 고승이며 고려 초의 선승이었던 원종대사 찬유는 성은 김씨였고 자는 도광, 계림이며 하남에서 용의 아들로(경문왕 9년)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상주 공산 삼량사에서 융제선사에게 배웠으나 융제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서 혜목산의 심회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890년(진성여왕 4년)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광주 송계선원에 있던 원종은 심회의 권유에 따라 892년에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 서주 투자산의 대동大同에게 배우고 곧 도를 깨달았다. 그 뒤 중국의 여러 사찰들을 유람하다가 921년(경명왕 5년)에 귀국하여 봉리마에 머물렀고 원감국사 현욱에 이어 진경대사 심회에게 법맥을 이어받게 된다.
심회는 삼창사에 머물 것을 명하였고 3년 동안 머물렀던 원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에 따라 경주 사천왕사로 가게 되지만 다시 이곳 혜목산 고달사로 되돌아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국사의 자리에 오른 원종대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을 이룩하였고 혜종과 명종은 가사를 내렸으며 광종은 그를 국사로 책봉하고 증진대사라는 호를 내렸다.
그 길을 곧장 따라가서 만나게 되는 부도탑이 국보 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 부도탑이다. 부도 중의 부도라고 일컬어지는 철감선사 부도나 지리산 연곡사의 동부도, 북부도가 크지 않으면서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이 부도는 장중함으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신라의 양식을 비교적 정직하게 이어받은 고려시대 팔각원당형 부도 중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부도탑은 경문왕 8년(868년)에 입적한 원감국사의 사리탑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웅장하거나 급하지 않고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라고 쓰고서 그 까닭을 "강의 상류에 마암馬岩과 신륵사의 바위가 있어서 그 흐름을 약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는데 여주읍 영일루 아래에 있는 큰 바위가 마암이다. 그곳에는 목은 이색에 얽힌 일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년째 되던 오월 신록이 물들어 가는 이곳 여강에 한 척의 배가 떠 있었고 그 배에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3은인 목은 이색과 그를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타고 있었다. 당시 이색은 이태조가 사신을 보내 벼슬을 내리는 것을 거절한 채 초야에 살고 있었고 이색의 제자들 역시 새 왕조에 참여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몰라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연후에 목은 이색은 술 한 병을 꺼냈다. 이성계가 보낸 술이었다.
그 술을 한 잔 마신 이색은 그 배 위에서 그만 세상을 하직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이색의 제자들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이 꾸민 계획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색의 의문사는 세월 속에 잠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남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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