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수양**/바우

춘설

빈손 허명 2022. 3. 23. 16:53

지난겨울은 눈을 보기 힘들었다

이 늙은 나이에 스키장을 갈 것도 아니고 집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봄도 겨울 정취에 취하는 길인데 말이다

어영부영 겨울이 지나갔다.

지난 겨울은 개성 없는 어떤 인간의 삶 같다고 생각했다. 겨울이면 겨울답게 매섭게 춥던가 흰 눈이 펑펑 내려 온 세상을 겨울답게 하얗게 감추어 놓던가 해야 제맛인데 이건 겨울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고 또 봄 역시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뜨뜨 미지금 한 것  을 두고 옛 어른들이 한 말이 생각나 웃었다. "뜬 물에 뭣 담근 듯.." 그것은 아런 저런 확실한 것이 아닌 즉 이편저편도 아닌 사람을 두고 말하기도 했고 성격이 확실치 않아 미온적인 사람을 일컬어 말하기도 했다

지난겨울이 그렇게 지나간 것이 아쉬웠을까? 봄이 돌아와 잠시 꽃을 피우는 일에 온 힘을 다하여 한 곳에 모아 정성을 다 하는 것을 시샘하는 듯한 자연의 시기심이다. 밤부터 펑펑 쏟아져 내린 함박은 을 아침에야 바라보며 한소리 했다

"겨울엔 오지않더니 봄에 웬 함박눈... 인가"

남녘엔 벌써 노란 산수유  며 목련이 피었다고 사진을 보내준 사람이 있다. 양지쪽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은 이미 인터넷을 열면 보이고 내가 사는 이곳엔 겨울 꽃망울이 조금 잎을 틔우려는 시기인데 눈이 쌓여 꽃이 잠시 계절을 잃고 방황하지 않을까?.. 그러나 위대한 자연의 심사는 다 생각이 있어 서 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봄이면 들녘에 나가 보리 싻 밟기를 해주어야 했다. 한겨울을 난 보리싻이 얼었다 녹으면 뿌리가 노출되어 모두 말라죽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일부러 학생들을 동원하여 보리 밟는 것을 권장했었다.

그래도 기어코 봄이 오고 온통 세상은 푸르른 새싹들을 틔워 돌아보면 파릇한 삶의 기상을 느끼게 되어 움츠렸던 몸에도 젊은 혈기가 도는 듯함에 봄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었고 삶의 원동 력이 되는 듯한 계절이었다

창 너머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는 재미도 수월치 않다. 새들이 날아가려 날개를 펼치면 나뭇가지에 쌓여있던 눈이 탄력에 한 뭉치 떨어져 내리고 어느 사이에 아이들은 눈을 맞으며 작게 눈을 뭉쳐 눈사람으 만들려는 듯 눈을 굴리고 있다

봄눈은 물기를 많이 포함하여 땅에 내리면 녹아내려 도로는 흥건히 젖어 있고 길옆 주차한 차들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봄을 맞는 듯해 계절을 되돌리려는 듯한 착각을 한다.

눈이 내리면 낭만이 가득했던 시절 코트 깃을 올리고 거리를 걷고 싶었던 젊은 날이 생각이 난다. 춥고 냉랭한 날씨 이기보다는 온화한 기온이 있는 날이 눈 오는 날이다. 공연히 마음이 들떠 눈을 맞고 걸어가는 멋진 모습의 영화 속에 그 사람 흉내를 내 보려 하다가 공연히 핀잔을 받고 머쓱하게 웃어넘기던 그 쓸쓸한  추억도 봄눈이 오던 날이었다

봄나들이를 다녀오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고 밀리는 도로 위에서 안타까이 눈이 멈추기를 기다렸던 시간도 모두 다 지나간 세월 속에 남겨진 그리움이다

먼데 아들이 눈이 오는 날 밀양댐으로 차를 몰고 가 사진을 찍어 보냈다. 여행과 술  이 블로그에 적힌 슬로건인 아들은 휴일이면 무조건 차를 몰고 나아가 어디엔가를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집안에 있으면 좀이 쑤셔 나가야 가슴이 후련해지는 고약한 외출 증이 있어 그의 보조를 맞추려는 아내의 배려가 대단한 사랑으로 그를 행복하게 한다

전국 각각의 맛집을 다니고 사진을 올려 구미를 돋우게 하는 별난 취미를 갖은 그가 이번엔 흰 눈이 쌓인 밀양 댐 위에서 포즈를 잡고 그의 여행에 한 페이지를 채웠다

사옥 지붕보수를 잘했다. 끝내자마자 비가 오고 눈이 와오 안심이 되었다. 삶은 일상으로 다가오는 매 계절을 익숙하게 보듬고 견디는 넉넉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듬고 달려오는 세월을 만나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 눈이 오는 봄날  애써 눈에 젖은 도로를 운전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느끼는 간절한 휴식이나 창 너머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는 한가한 여유가 행복의 척도가 되기도 하는 봄날이다

아들이 사보 낸 제주도 흑돼지 삼겹살을 넓은 프라이 판에 얹어 놓고 양파를 썰어 덮었다. 배추김치를 큼직하게 썰어 그 위에 덮어 놓고 불을 올렸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입맛을 돗구었다. 아무런 반찬도 필요 없이 밥 한 그릇을 가운데 놓고 아내랑 마주 않아 밥을 먹으며 바라본 창밖에는 이미 눈이 그치고 회색 하늘이 바람에 스치듯 흘러가는 게 보였다

사는 게 별것 아니다. 살다 보니 세월과 타협하는 방법도 알게 되고 나 자신에게 위로를 보낼줄도 알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도 통 크게 배려하는 법도 터득하여 무료하고 고단한 시간의 무게를 털어내기도 한다

늙음은 봄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자연이 봄이된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더 신비로워 운동을 하는 길에 버들가지가 잎을 틔우려 조금씩 벌어지는 별것 아닌 모습에 감탄을 하고 길섶 꽃 따지의 초록색 잎이  펼쳐지는 것조차 탄성을 지르고 바라보는 것이다. 크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큰 감동을 찾는 세월이 오늘도 지나간다

얼마나 이러한 봄을 더 맞이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린 손주가 내일 온다니 벌써 마음이 들뜬다. 학교에 입학 한 어린 늦둥이 손녀에게 새 옷 하나 사주려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들뜸은 늙은 증거이다.

사랑하나 뿐이 남겨있지 않은 세월에 그 사랑이 마르지 않도록 더 많은 배려와 다독임으로 남은 시간을 채움이 하얀 봄눈이 녹듯 스미고 스며 어느 날이 돌아오면 편하게 아주 편한 마음으로 버릴 수 있게 되길 마음으로 염원한다. 먼데 아들이 운동을 갈 시간을 문자로 보내왔다. 밀양댐을 다녀오고 또 운동을 나간다니  참으로 건강은 타고난 사람이다.

시장을 보아 논 것을 정리하는 아내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꼭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가보려 한다

늙은 아내와 같이 사는 하나의 지혜이다. 같이 살다가 늙어가는 이 몸 마주한 아내의 눈빛 속에 잠드는 연습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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