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수양**/나의 일기

고마운 아내

빈손 허명 2021. 5. 24. 10:09

1988년 88올립픽 감동의 끝을 잡고 10월 23일 처녀 총각을 벗어나는 한쌍이 있었다..

국민학교 가장 절친중 한명의 친구가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가서 살고 있었는데 1988년 초

친구의 형님 결혼소식에 창원에서 안성까지 형님 결혼식에 참석을 하였다 

친구 아버지께서는 나의 아버지와 국민학교 친구인 대를 이은 친구인 셈이다 서로 집안에 대하여 잘알며 어린시절부터 친구와 난 허물없이 함께 뒹굴던 사이였다

결혼식당에서 형님이 객지여서 필름사진 찍을 친구분이 없어 내가 예식장을 누비며 사진 기사를 하고 있는데...

혼주석에 앉아 있어야 될 엄마가 사진찍는 내 뒤로 따라다니며 "욱이가 니 아니면 시집 안간단다"라며 니가 어찌 해봐라 하시며 따라 다니시는데... 어무이 일단 자리에 가서 앉아계셔요 예식 끝나고 집에가서 이야기 해요하며 자리에 앉혀 드렸다

예식이 끝나고 안성 촌 외딴집에 가족이 다 모였었는데...  욱이 너 창원 한번 내려 올래?

창원엔 회사가 많아 신랑감 줄 세워두고 골라잡도록 해줄께 했더니 날잡아 온다고 한다

보름쯤 뒤엔가 기차를 타고 창원에 왔는데 나랑 데이트하고(아마 내가 흑심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경산 친구의 고모집으로 배웅해 주었다 그뒤 편지로 사랑의 새싹이 올라 왔을때 어느날 내려오라 하여 저녁 먹고 소주도 거나하게 마시고는 그당시 마창대교 넓은다리 한복판에서 나와 결혼하자며 포옹을 하였다 그게 프로포즈였다 나름 괜찬은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흔히 말하는 감자 두쪽만 가지고 결혼하자 하였으니.... 내가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렇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자신이...

둘이 의기 투합하여 나는 누님들밖에 없었지만 친구집은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야 했기에 인사드리고 허락을 받아 그해 식을 올리게 되었다(뒤에 밝혀진 이야기는 과거 군대 첫휴가때 영남대 정문에서 버스를 세우고 해병대 기질?을 보이는걸 아버지께서 보셨는가 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야 명이 해병대 곤조있던데 욱이 보내도 될까??  친구가 중간에서 저런 친구 없다 괜찬아요 적극 옹호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결국 나의 장모님이자 어무이께서 중신애비 였다

나의 사랑스런 아내 욱이는 엄마께 "나는 작은오빠 친구중 허명이라는 사람같은 사람이면 시집가겠다"고 했다는데 엄마가 확대해석 했다고 변명하는데.... 그말이 그말 아닌가??  ㅎㅎ

ㅎㅎ 눈은 있어서 일찍 점찍은건 아닌가...ㅎㅎ  그렇게 절친 친구 동생은 내품으로 왔다

 

결혼을하고 창원의 작은 전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 하였다

1986년 노동 민주화 물결에 편승하여 우리회사도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설립때부터 깊이 관여한 나는 자의든 타의든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이듬해 여름 거센 파업의 소용돌이 속에 50여일인가 굉장한 파업이었다  그때 노무현 당시 인권변호사께서 며칠을 현장 파업 진두지원하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회사회장님은 노동자들과 합의를 하고 서울 본사로 올라간다고 영빈관에서 스스로 머물러 있는데...  불법감금이라 언론은 여론몰이를 하여 근로자들이 과도한 쟁의라 하고 있었고 나는 지병이 있는 어무이께서 위독하다는 연락에 경산으로 올라와 신문으로 뉴스로만 조합원들을 응원하였다

계속되는 파업으로 공권력 투입되어 지도부 전원 구속되고 나는 먼길 떠난 어무이 보내드리고 회사로 복귀를 하였다

조합에서는 간부 몇명만 남아 대책회의를하고 구속자 석방 대책위를 구성하는데

구속자 석방 위원장을 내가 맡아 사방 팔방 구속자 석방을 위하여 뛰어 다닐때였는데 그때 부산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 변호사 선임관계로 두번 방문을 하였다 처음 방문에 노변호사님은 출장중이었고 문재인 변호사 혼자 어둑한 사무실을 지키고 있어 면담을.... 사무실이 대체로 어두웠고 작은 소박한 사무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재인 변호사는 노변호사 오면 전달하겠다고... 별로 하는것없이 자리만 지키는듯한 첫 인상 이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렇게 노동운동에 심취해 1년이 지나고 욱이와 10월 23일 식을 올리고 신혼첫날부터 조합 간부들 매일 정신교육에 술교육에 집에는 새벽 2시전에 들어간 기억이 없다.

결혼 첫날부터 새벽에 그것도 매일 늦게 귀가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도망 가지않은게 신기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함밖에....

2개월을 그렇게 새색시를 방치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그런 노동운동이 아닌 그들만의 운동에대한 회의 신부에 대한 죄스러움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모든것 청산하고 고향으로 올라가리라 결심하고 아내와 의논도없이 두곳에 사표를 던졌다 그날 결혼후 처음 자정 전에 들어간 날이다

영문도 모르는 아내는 일찍(?) 들어온 남편에 감사의 박수를 보내왔다. 그때 아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래도 아내는 늦도록 일하는 남편이 애처로왔을 마음이 가득 하였으리라

그냥 도닥도닥.... 그리고 사표낸 이야기 둘이서 열심히 잘살아보자 할때도 큰 눈만 끔벅끔벅 무언의 동의가....

앞으로 불확실한 새로운 일들이 어떻게 다가올지 아무예측도 못한채 무엇이든 해보자 각오를 다지며 경산으로...

 

1989년 1월1일 고향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둘째누님과 자형이 세탁소를 하고 있었는데.... 우여곡절끝에 그 세탁소를 인수받아 옷 다름질부터 배우고 옷수선 재봉틀도 배우고....  지금까지 해온 모든것과는 완전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제 아내의 일이 많아져 힘들어진다

가게는 아무래도 여자할일이 많기 때문이다

시작하면서 아내에게 5년만 하자 5년후엔 좀 편한 업종으로 바꾸자 함께 마음을 다잡으며 일이 많을땐 늦게까지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기계돌리고 다름질하고.... 영남대학교앞이라 학생들 특히 야구,축구부선수를이 주고객이었다

어느 장사든 부부는 하루종일 둘이 붙어있야한다. 아무것도 아닌걸로 서로 의견충돌도 많았지만 큰 영향없이 앞만보고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쁜공주가 우리 곁으로 오면서 일의 재미를 붙여간다

3년여 지나는 시기 앞 오락실 사장이 형님 오락실도 같이 해보이소 나는 함안 칠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니 오락실

형님 아시다시피 모르는 사람에게 주기가 너무 아깝심더~~~~

여러가지 고민끝에 무리하여 인수를 하였다  마이너스 인생의 시작이다

나의 아내는 더 바빠졌다 공주보랴 수선하랴 오락실 관리까지.... 매일 현금을 만지는 기분에 위안을 받는지 힘든 내색은 없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상가 발전협의회신규 발족, 뱡범대신규발족, 의용소방대가입등 지역발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봉사활동도 하였다 모두 총무역활을 맡아 회장을 보필하고 조직을 이끌어 간 경험이 얼마지나지 않아 새마을금고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내가 바깥활동이 잦을수록 집의 아내는 더외롭고 힘이 든다는걸 이때까지 나는 모르고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좌충우돌 달리고 있었다

장사 시작한지 5년이 되어갈무렵 왕자님이 울보 왕자가 또 우리 곁으로 왔다

정신없이 앞만보고 살다보니 행복이 뭔지 느낄 사이도 없이 세월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가면 남의 남자 들어오면 내남자"라고 말하는 나의 영원한 아가인 내 아내를 태운 빈손호는 그렇게 흐르고 있다

행복과 사랑이라는 돛을 달고 쉼없이  흘러간다

이젠 나는 아내가 좋아하고 하고싶은 것만 해주며 살것이다

 

2021.5.26

 

 

 

 

 

사진은 청도 와인동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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