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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의 유래

빈손 허명 2006. 2. 28. 14:05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유래


지금은 별로 쓰지 않는 말이 되었지만 수 십 년 전만 해도 아이들을 어르거나 놀릴 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고, 너의 진짜 엄마는 지금도 그곳에서 예쁜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울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어른들로 많이 들었다. 어른들의 그 말을 처음에는 별로 믿지 않던 아이들도 정색을 하고 몇 번씩 이야기하는 어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곤 하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도 지금 아이들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런 말을 들으면 인터넷에 가서 확인을 한 다음 그 말이 어째서 거짓말인지에 대해 당장 어른들을 가르치려 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효력을 잃어버린 말이 바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다리를 종합해보면 아이가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리가 주로 등장하는 특징을 지닌다. 서울의 경우는 청계천 다리 밑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각 지역에 따라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신빙성이 생겨서 아이가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 말은 과연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아주 재미있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이 처음 생겨난 곳은 그전에는 강원남도였다가 지금은 경상북도가 된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 옆에 있는 ‘청다리’라는 곳이다. 순흥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지역으로 원래 고구려 땅이었다가 신라로 편입되었던 곳이다.

 

고구려 때에는 급벌산군이었다가 신라로 편입되면서 경덕왕 때에 급산군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에 와서는 흥주로 되었고 고려말 조선초에 순정 혹은 순흥으로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니는 순흥은 영남지역의 문화 중심지로 자리를 해오면서 그 명성을 떨쳤는데, 북쪽에는 송악이 있고 남쪽에는 순흥이 있다고 할 정도로 큰 도시였으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비가 올 때도 비를 맞지 않고 처마밑으로 십리를 갈 수 있을 정도로 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는 말은 순흥의 번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명성을 떨치던 순흥이 멸망의 길을 걸은 것은 세조 때의 일로 이곳으로 유배 온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역모의 땅으로 지목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건만 그 때의 아픔은 아직도 이 지역에 면면히 남아있는데, 금성단, 위리안치지지, 압각수, 경자바위, 피끈(끝) 등에 유적과 전설로 아로새겨져 있다. 


“다리 혹은 청다리 밑에서 아이를 주워왔다”는 말이 생겨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수서원은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를 세운 후 이듬해에 백운동 서원을 건립한 것이 시초였다. 그 후 1550년에 풍기 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임금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라고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체계적인 사립대학은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처럼 최초의 사액서원이 성립되자 이때부터 전국의 선비들이 공부와 수양을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순흥은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소서서원에 공부를 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선비들은 주로 젊은 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이 그 지역의 처녀들과 사랑을 나누면서부터 사회적인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남녀가 사랑을 하면 거의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가 바로 임신인데, 현대사회처럼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인지라 아이를 가지면 낳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교사회였던 조선조 사회에서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으므로 당사자 집안에서는 비밀리에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갓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한 밤중에 소수서원 옆에 있는 청다리 밑에 갖다 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버려진 아이는 누군가가 데려가지 않으면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이 소문이 점차 퍼져나가자 이번에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선비라면 최고의 신분이고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핏줄을 데려가 기르는 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안에서는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전국에서 몰려든 아이 없는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아이를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운이 나쁘면 몇 달씩을 기다려서 아이를 얻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전국으로 입양된 아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런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지금도 그 말이 남아있을 정도인 것을 보면 상당수의 아이가 입양되었다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변화를 거듭하여 현대에 들어와서는 해당 지역의 다리를 증거물로 하는 이야기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흥의 청다리는 이런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인데, 지금은 그저 평범한 시멘트 다리에 불과한 모습이다. 그러나 청다리의 유래에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효불효전설(살아있는 부모에게는 효도지만 죽은 부모에게는 불효가 되는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옛날 옛날 아주 옛날의 일이었다. 소백산에서 내려온 물이 죽계구곡을 지나 지금의 청다리 부근으로 흘러오는데, 그 때까지 이곳에는 물을 건너는 다리가 없었다고 한다. 죽계천의 남쪽 마을에는 아들을 하나 둔 과부가 있었는데, 이 과부는 청춘에 홀로 되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키우면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죽계천 북쪽에는 짚신을 삼아서 파는 짚신장수 홀애비가 살고 있었다. 이 짚신장수 홀애비가 순흥 시장에 짚신을 팔러왔다가 과부와 눈이 맞아서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연애가 금지되었던 옛날 사회에서는 두 연인이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인지 밤중이 되면 과부는 죽계천의 물을 건너서 짚신장수를 만나곤 하였다.

 

봄이나 여름에는 그래도 괜찮지만 추운 겨울에 발을 적셔가며 물을 건넌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돌다리를 놓아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돌다리도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건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순흥 고을로 중앙에서 높은 분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은 높은 분이 지나갈 때를 기다려서 그 앞에 나가 어머니의 일을 고하고 다리를 놓아달라고 청을 넣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정을 들은 높은 사람은 아들의 효성이 지극하여 다리를 놓아주게 되었는데, 청을 넣어서 놓은 다리이기 때문에 청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 다리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는 불효를 저지르게 된 다리이고, 살아있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효도를 하게 된 것이니 불효라고도 하기 어렵지만 효도라고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이 다리를 효불효다리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