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이라 하는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 보길도 세연정 중 오늘은 보길도 윤선도 원림의 세연정을 소개합니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 광해군부터 인조시기까지 활동했던 문신•시인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왕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제주도로 떠난다. 떠나는 중 보길도를 지나게 되고 보길도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제주도행을 포기하고 보길도에 터를 잡는다.
고산은 섬의 모양이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붙이고 섬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었다.
이번에 소개할 곳은 그 중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공적인 기법으로 조율한 ‘세연정’이다.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가 조성한 전통 정원이다.
담양의 소쇄원과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전통 정원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원림이다.
지금은 들어가면서 고산 윤선도 기념관을 먼저 볼 수 있다. 그곳에서 고산의 삶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세연정은 원래 터만 남아있었지만 1993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고산은 자연적으로 흘러드는 물을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듯 판석으로 된 보로 막아 연못(세연지)를 만들고,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거기에 정자(세연정)을 지었다.
세연은 물에 씻은 듯 깨끗한 자연이라는 의미다. 세연지 중앙에 놓인 세연정은 일반 누각과 다르게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창호와 마루를 둘렀다.
창호는 분합문으로 문을 모두 들어 걸면 사방이 개방된 정자가 되어 주변의 풍경이 정자와 조화를 이룬다.
고산은 세연정의 앞에 석축단상인 동대와 서대, 서쪽 산의 옥소대를 끌어들인 거대하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냈다.
이곳에서 예악(禮樂)으로 자연과 합일을 추구했다. 세연정에 들어서다보면 일곱 개의 큰 바위가 연못 속에 놓여있다.
이를 ‘칠암(七巖)’이라고 부르는데 고산의 오우가에 물과 돌이 먼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세연지과 칠암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칠암은 문학적인 역할뿐 아니라 호우가 내릴 때 유속을 떨어뜨리기 위한 과학적인 건축물이기도 했다. 고산의 또 다른 벗인 송, 죽 또한 연못 주변에 서있다. ‘연정고송(然亭孤松)’ 부용동의 팔경 중 하나로 외로이 홀로 선 소나무도 고고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밤이 되면 고산의 다섯 벗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옛 시인의 감성을 느껴보는 기회를 가져보자. 또한 이곳에서는 고산이 즐긴 풍류를 느낄 수 있다.
물로 씻은 듯 깨끗한 자연을 보고 여기 있는 사람마저 깨끗한 이 모습에 녹아드는 느낌이다.
말 그대로 물아일체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고산에게 세연정은 유희의 공간이었는데 악공들이 동대와 서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연못에 비치는 옥소대 무희들의 춤을 보며 배를 띄워 술과 음식을 즐겼다.
세연정과 세연지는 인공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인공미가 자연에 잘 녹아있다.
옛 선비들은 연못을 네모나게 만들고 그 안에 동그랗게 섬을 만들었다.
네모난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동그란 섬은 하늘을 상징한다. 하늘을 품은 땅으로 이는 인간의 몸 안에 마음을 품었다는 옛 선비들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의 마음을 사로잡은 보길도, 그가 느낀 아름다운 보길도의 모습을 이번 여름휴가느껴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머물렀다고 한다.
보길도는 그가 인조 15년(1631)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다. 또한 그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은 아직도 남아있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이라 하고, 그 건너 산중턱 위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계곡의 동북쪽에는 ‘세연정’을 세워 책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보길도에는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