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수양**/나의 일기

새마을금고와 나의 꿈...

빈손 허명 2022. 6. 2. 10:14

창원의 현대정공에서 직장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올라와 자영업을 한지 5년이 되어가는
1993년 3월 어느 날 국민학교 동창인 나의 친구가 새마을금고 정관을 던져주면서
"이거 한번 읽어 보아라 3일 후에 올게"라고 하며 돌아갔다.

친구가 가고 난 후 그 정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 새마을금고가 지역사회에 환원사업과 복지사업을 하는 곳임을 처음 알았고 그 정관을 읽어 보면서 "아 이런 것도 있구나.. 내 몸을 불태워 봉사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당시에 나는 자영업을 하며 먹고살기가 너무 빡빡해서 봉사라는 것은 생각만 하였을 뿐 실천에 옮기기엔 사정이 매우 어려웠었는데 새마을금고를 통하여 지역사회에 많이 기여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흥분했었다.
3일 후 친구가 "어떻게 할래" 라며 의견을 물어 왔을 때 망설임 없이

"그래 같이 해보자"

그렇게 시작된 것이 새경산 새마을금고의 전신 북부 새마을금고의 탄생이었다
당시 친구는 설립인가 쪽으로 사무적인 일을 맡았고... 나는 대인관계가 좋은 관계로 지역 유지들을 모으고 사람들을 동원시켜 조직을 만들어갔다.

장소가 영남대학교 정문 앞이라 상가 발전 협의회 총무를 맡고 있었던 영남대 상가의 모든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나는 능력 있고 활동성 있는 사람으로 초대 임원진을 구성하여 매일 늦게까지 새마을금고 탄생을 위하여 달려갔다.

그분들과의 인관관계는 끈적한 정으로 맺어져 임원회의시 실비도 없이 함께 그 힘든 시기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당시 35세 두 젊음의 겁 없는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출자금을 모으고 법적 인가 요건을 충족시키고 직원을 뽑고 드디어 1993년 6월 19일 창립총회를 하고 지역 금융의 첫출발을 내 디뎠다
친구가 실무 상무를 맡고 나는 과장을 맡아 여직원 한 명과 영남대 앞 제일 후미진 곳 7평의 작은 사무실에서 금융업을 시작한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이때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국민학교 시절은 딱히 무엇을 해보고 싶었다거나 어떤 것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마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커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난다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무역학과 가서 세계를 누비는 바이어가 되고 싶었고 또 하나는 축산 학과에 가서 넓은 초원에서 백마를 타고 소를 부리며 자연과 유유자적을 하고 싶었다.

어릴적 꿈은 나의 능력치 보다는 더 내 주위 여건보다도 더 이상적으로 높은 꿈을 꾸었나 보다
전혀 상반된 두 가지 꿈을...
이상만 가진 꿈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꿈은 꿈으로 끝이 났다.
나의 어릴 적 꿈은 나의 집 가세가 크게 기울어 모든 것을 접고 먹기 살기 위하여 힘든 여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서없이 시작한 새마을금고 업무가 2개월 만에 난관에 부딪치고 만다.
등기를 위하여 이사장의 인감이 들어가야 하는데 자기 재산을 어찌 될까 봐 이사장을 그만둔다고 한다..
창립총회까지 했는데...
고심 끝에 지금은 고인이 되어 하늘나라 어느 별에서 쉬고 계실 현** 분에게 의사 타진을 하였다.
그분은 당시 기초 의원 출마하여 낙선하고 초야에 묻혀 계시고 있는 친구 아버지시다
더 능력 있는 분을 모셔라 하고 거절하시는걸 친구와 삼고초려를 한끝에 이사장직을 수락받고 다시 임시총회를 열어 정식 출범하여 좌충우돌 뛰어다녔고 첫해엔 봉급도 없이 일을 하고 그 이듬해부터 거의 용돈 수준으로 1년간 받으면서도 열정적으로 일을 했다.
창립 그해 바로 소나기 쏟아지는 어느 날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가 기습적으로 선포하고 실시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금융 햇병아리들은 흐느적거리며 금융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바쳐 달려가고 있을 때 나는 1년 반 만에 사표를 내고 다시 자영업으로 돌아갔다
맹랑한 여직원이 나와 친구의 사이를 이간질을 한다
당시 친구이자 이사 한 사람이 매일 야근하는 것을 보고 통닭 한 마리에 소주 한 병을 가끔 가지고 와서 야식을 먹으라 하였다.
사무실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되지만 이사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그렇고 또 업무는 다 끝나고 내부에서 잔업을 하고 있어 종이컵에 물처럼 따르고 술병은 바로 치우고 먹었다 그걸 친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친구는 술 마시는 나를 이해 못 하고 나에게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자 나는 친구 잃기보다는 내가 사표 내고 나가는 것이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다시 자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장사를 시작한 지 6개월 금고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힘들어 밀양 무안에서 또 하나의 금고를 설립하였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생각하니 무모한 도전이라 생각난다

무안에 연고가 하나도 없이 단지 무안면에 농협외에는 금융기관이 없고 고추 농사로 자금이 많이 흐른다는 정보만 가지고 내려가 무작정 지역 유지를 찾아 도와 달라고 읍소하고 몇개월을 무안에서 살다시피 좌충우돌 또하나의 유를 만들어 낸것은 겁없는 젊은 패기가 있어 가능 했을 것이다
아마 새마을금고 2개를 설립한 사람도 나 혼자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무안면 주민들을 금고로 끌어 모았고 밀양 시민이 되기로 결심하고 집을 알아보려 다녔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친구야 "나는 대학 교수가 꿈이다"
"관내 ㅇㅇ대학교수 자리가 나서 가기로 했다"
"어차피 봉사하려면 여기 여기에 네가 와서 고향에서 봉사를 해라"
"이사회의에 네가 월요일부터 출근한다고 이사회 의결까지 다해놨다"라고 무안에서 하던 일들 신속히 정리를 하고 월요일 북부 새마을금고로 출근하라고 한다.
밀양 무안에서도 정리를 하여야 되는데 나를 믿고 도와준 무안 금고 회원들이 있는데...
물은 흐르는 데로 흘러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무안 새마을금고 설립을 함께한 이**동료와 김**이사장께 말씀드렸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가야겠다고 나의 마음을 보였었다
김** 이사장이 "그래 큰 물에 가라 단 언제든 너의 자리는 비워 둘테니 경산에서 힘들면 여기로 다시 오너라.."

정이 넘치는 진정 나를 위한 배려의 배웅을 받고 경산으로 돌아 왔다


이렇게 다시 고향에서 금고를 맡아 이끌기 시작하였다
새마을금고를 설립한 후 미친듯 일에 몰두하였고 경산에 새마을금고 11개 중 제일 설립이 늦은 북부 새마을금고가 성장하여 2010년 외형 자산이 3위까지 올라섰다.
그리하면서 처음 생각해 두었던 복지 사업으로 두 가지를 다시 계획한다
하나는 장학회
또 하나는 실버타운
장학회는 금고에서 매년 수익에 따라 기천만원씩 출연을 하고 나의 인맥을 동원하여 1인당 한 계좌 만원씩 출연을 받아 새마을금고 장학회 설립한다는 계획이다
장학회는 사단법인 설립조건이 2억의 자본금이라서 최대한 빠른 시일에 이억을 맞춰서 장학회를 만들어 지역 후배들의 인재를 발굴하고 키우는데 필요한 여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버타운...
당시 내가 전무로서 경북실무자 협의회 부회장을 맡고 있을 때 였다
전국 실무자 협의회는 전국 돌아가며 할 때였는데 어느 날 경기도 회성에서 위크샵이 있어 경북 회장단으로 참석을 하였다
겨울이라 도착하니 사방을 분간하기 어렵고 그냥 행사장에서 워크숍을 마치고 만찬에서 술도 한잔하고 배정받은 방에서 잠을 잤다
아침잠이 없는 나는 새벽에 일어나 5층이 식당이었는데 이리저리 큰 건물을 돌아다니니 할아버지 할머니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이상하다 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렇게 많지.?
나는 궁금증은 풀어야 했다
프런트에 가서 왜 노인분들이 이렇게 많은지를 물어보니 여긴 실버타운 겸 유스 호스텔이라 하였다
당시 경산에서는 실버타운이 하나도 없었고 요양원이 한창 개원하던 시기였었다
나는 요양원 설립을 위하여 요양 보호사 1급 자격증도 따고 요양원 설립 방법 등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금고 회원들을 위하여 봉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 실버타운을 보고 "아.. 이거다 실버타운을 금고 자회사를 설립하여 만들자 "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당시 그 실버타운 입주 조건이 보증금 2억에 월 400 만원이라 한 것으로 기억된다
입주조건이 너무 세다는 생각은 날이 밝으며 자연 풀렸다
창밖으로 본 주위 환경은 멀리까지 잔디 가 깔린 골프장에 온갖 편의시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간호사까지 상주하며 노인들을 불편 없이 모시고 있어 최고의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여기가 유토피아란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나는 이 두 가지를 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운다
지인들에게 장학회 회원이 되어달라고 구두 약속을 받고.. 그러던 중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평생 젊음을 불태우고 청춘을 보낸 이 금고에 타의에 의한 강압적인 사표를 내고 나오게 된다
내가 계획하는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좌절을 하고 불명예 퇴진을 한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와신상담 이란 말을 가슴에 깊숙이 담고서 명예 회복을 위해 홀로 긴 시간 준비를 하고

여러 대의원들의 도움으로 선거에서 당선되어 일차적으로 명예회복을 하였고 이사장으로 되돌아와 새마을금고를 위하여 봉사를 하고 있다
요즘 가끔 내가 꿈꾸었던 그 꿈에 대하여 되씹어보고 있다
그때 금고를 나오지 않았다면 지역을 위한 일들 나의 조그만 꿈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나의 잃어버린 8년 그 8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나는 새마을금고에서의 꿈을 이루려 노력할 것이며 현재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위한 꿈의 직장을 만드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내가 언제까지 이사장직을 수행할지 모르지만 새경산 새마을금고를 최고의 직장 가장 일하고 싶은 새마을금고로 만들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여러 복지사업을 하며 소외된 회원들을 도우며 선도하는 지역 금융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렇게 밖에서 미친 듯 일할수 있도록 "나가면 남의 남자 들어오면 내 남자"라고 하는 아내가 있어 가능하였는데 이런 아내가 있어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나는 새마을금고인이다
뼛속 깊이 새경산 새마을금고인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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