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탓인가 나이 탓 인가는 모르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도 한번더 둘러보고는 늦게 불을 껏다
창넘어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풀을 베어내지 못해 무성한 풀잎사이로 그들만의 만찬이 시작되는 듯하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어머니는 노심초사 나를 위해 무얼 더 해 먹일까 를 고민하시는 듯 했다
유일하게 서울로 공부를 하러간 막내 아들이 사는 것을 훤하게 아는 처지라 아마도 가슴이 메어지는 것을 참는 게 분명했다
전농동 철도 관사의 헛간의 쪽방을 빌려 자취를 하는 게 오죽 하겠나마는 나무 판자를 비슷하게 덧댄 벽을 넘어오는 열기는 대단했다
계단아래 철길을 가로 지르는 굴다리 근처에 노천시장에서 콩나물을 지겹게 사다 끓였다
그래도 이리 건강하게 몸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어머니가 늦둥이를 나으셔도 건강하게 자라게 해주신 덕이다
식구들이 잠든 늦은 밤 어머니는 나를 흔들어 깨우신다
밤늦게 라도 병아리 한마리 고아 먹여 보내고 싶은 모정이다
감자를 캐어 저정하곤 잔 것 들은 공동우물가에 서 독속에 물을 담고 썩힌다
우물가를 지날적마다 감자 썩는 냄새는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다
감자가 다 물러 지면 손으로 주물럭 거려 껍질을 건져 내고 물에 엉긴 전분을 가라 앉혀 몇번을 헹구고 나면 뽀송한 가루가 남고 그 가루로 송편이나 부침개를 만들었다
고속도로를 지날때 마다 사먹는 감자 송편을 가난한 추억의 그림자가 아직도 마음속에 드리워진 기억의 보상이다
감자 음식은 따듯할때 먹어야 제맛이다
식으면 야들야들 한 촉감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맛으로 남기에 열정이 식기전에 사랑을 쌓아가듯 따듯할때 먹어야 하는 이중적인 성질이 있다
육이오 전쟁때 추은겨울 우리는 온동네가 모두 피란을 갔다
충북 괴산 의 어느집 사랑방 윗몫에 가려진 수수깡 으로 만들어 놓은 저장고 엔 고구마가 가득했었다
왕겨로 켜를 쌓고 고구마가 얼지 않게 수수깡을 엮어 벽을 만들어 놓고 그들도 피란을 떠났기에 우리는 빈집사랑방에서 잠시 머물렀다
여섯살 꼬마는 작은 손을 그속 틈새로 넣어 그속에 보관 되어진 것이 고구마라는 것을 알고 하나씩 꺼내었다
남의 것을 훔쳐 먹는 다는 죄 책감보다는 배고픔을 달래려는 본능이 더 앞서 있었다
우리도 집 사랑방에 보관한 것 을 꺼내 먹듯 처음엔 하나씩 둘씩 꺼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숫자를 늘렸다
나도 형도 같이피란 간 그 아이도 배고픔을 참지 못했다
"내일이 또 장날이네요.."
아내도 잠들지 못하는 나를 달래듯 말을 걸어왔다
시골 5 일장이 어제 같은 데 또 내일로 다가오고 점점 더 시간은 빠르게 지나는데 무심히 들리는 풀벌레 소리만 고요속에 숨쉰다
"약수터를 갔는 데 산이 훤해요.."
"산이.. 왜 ?"
"벌써 낙엽이 지니 잎사귀가 줄어들어 그런듯해요"
"덥다 덥다 한지가 어젠데...가을이라니.."
가을이오면 배가 괜히 부르다고 한 부모님 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들녘 황금 색으로 변한 논둑에서 참새를 쫒던 어린아이가 어느새 나이들어 선잠을 깨고 돌아갈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 한다
수확 할거라곤 김장 배추와 무우 뿐이지만 가을은 파란 하늘과 좀 다른 햇볓과 알싸한 아침 저녘의 바람과 귀뚜라미 같은 풀벌레 울음 소리가 공연히 마음을 바쁘게 한다
손주가 유치원에 입학을 할것이지만 갈수가 없다
바다이야기에 빠져버린 나라의 앞선 사람들은 구명정을 펼처 입느라 바쁜듯 아무소리가 없다
지금도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는 변함없는 나의 삶에 지루함을 느낀다
나는 변화를 즐겼다
큰 변화보다는 작은 변화를 즐기며 그 작은 변화가 차차 삶을 조금씩 새롭게 새로움을 발견하는 재미를 즐겼다
사람을 만나 새로운 것에 대해 토론하고 도전하고 내가 알지 못하던 것들을 그들로부터 알게 되는 희열을 참기 어렵도록 즐겼다
사람을 초청해 마당에서 숫불에 자주 불을 붙였고 대문입구에 많은 차세울 곳을 마련해 두고 가든 파티 아닌 만남을 즐겼다
여름엔 모기와 전쟁을 치루지만 좀 가을이 깊어가면 밝은 달이 있고 살랑이는 바람 결에 불꽃이 번지며 익혀주는 삼겹살의 내음이 있었다
술잔을 돌리고 큰 웃음소리를 내면 그들은 이미 하나의 소속감을 느끼고있었다
내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술잔을 받던 사람도 당당히 내게 술잔을 건네던 사람도 모두 삶속에 자신의 존재를 눞힌듯했다
"다 무얼할까?"
원로라는 이름마져 듣기 거북한 시절이다
사람을 만나서 서로를 바라보고 의기를 투합하고 나누던 사람들은 다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20여년만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안부를 묻는 다
이름도 잊혀지지않는 전두한 이란 사람이다
경상도 특유의 억양으로 안부를 물어오면서 잊지않고 내게 일을 상의 하려햇다
"나는 늘 여기에 있을 거야..고향어귀의 느티나무 처럼..여기에서 기다릴게 언제라도 연락해.."
전화 번호를 바꾸지 않았고 주소역시 30년그대로 다
가끔은 몸서리 치게 그리운 사람이 있다
다가오는 가을에게 책 잡혀 웃음 거리가 되지 않을까?
전전 긍긍하다가도 제버릇을 누굴 줄까? 괜한 설레임만 가슴으로 채운다
벌초를 하러 가는 날은 돌아오는 일요일이다
조상님들 묘역을 깍는 일도 쉬운일은 아니다
서울에 있는 조카들도 집안 친척들도 모두 모이면 좋은데 삶은 그것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내가 죽기전에 부모님을 화장으로 모시고 갈거다"
공연하게 말을 한다
나이들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생각의 틀도 빈 구석이 많아 지게 마련이다
슬기롭게 사는 것 역시 젊을때 이야기다
요즘 나이든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는 사람이 없다
잔소리나 귀찮은 투정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대통령도 그러니 오죽하랴....
가을은 그리움만 몰고 온다
긴밤 뒤척이는 시간에 일어나 앉아 불경이나 외우련다
왜 저 새는 잠자지 않고 깊은 밤을 울며 지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