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수양**/퍼온 글

몇편의 시

빈손 허명 2021. 10. 19. 15:17

사는 일 .. 나태주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 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개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이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사랑과 배려>

'사랑해' 를 천만번 말해도

'사랑함' 을 느끼게 해주는 한번이 감동이고

'미안해' 의 습관성 멘트보다

'고마워' 의 따뜻한 한마디가 깊이있고

'어디 아파' 를 여러번 물어도

'병원 가자' 로 당장 일어섬이 낫고

'앞으로 잘할게' 로 호들갑 떨어도

'나한테 기대렴' 의 과묵함 보다 못하고

'바빠 나중에 전화할께' 의 솔직함 보다

'미안해 끝나고 만나자' 의 성실함이 오래가고

'내일 자기 뭐할거야' 의 애매함 보다

'내일 우리 기념일야' 의 확실함이 센스있고

'너무 보고싶어' 의 식상함 보다

'나와 집앞이야' 의 상큼함이 진취적이고

'이렇쿵 저렇쿵' 의 수다도 좋지만

'그랬어 저랬어' 의 맞장구가 흥을 돋고

'역시나 명품이야' 의 허울 보다는

'당신이 명품이야' 의 진심이 진국이고

'친구야 나야' 의 단답형 보다

'오늘만 이야' 의 이해형이 러블리하고

'어디서 뭐해' 의 의심보다

'밥먹고 일해' 의 믿음이 힘을 주고

'너는 항상 그래왔어' 의 잔소리 보다

'혹시 무슨 고민있니' 의 관심이 맘을 열고

'나한테 해준게 뭐있어' 의 책망보다

'나에겐 니가 선물이야' 의 격려가 정감있고

그리고...

'변한거니' 의 찌질함 보다

'행복해라' 의 담대함이 쿨하다

 

 

 

부부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가슴에 내리는 비 ㅤ

                              운보영ㅤ



비에는 옷이 젖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에는 마음이 젖는군요
벗을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고

비가 내리는군요
내리는 비에 그리움이 젖을까봐 
마음의 우산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보고싶은 그대여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대를 찾아 나섭니다
그립다 못해 
내 마음에도 주룩주룩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리는 날은 하늘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면 맑은 하늘이 보입니다
그 하늘 당신이니까요

빗물에 하루를 지우고 그 자리에
그대 생각 넣을 수 있어 
비 오는 날 저녁을 좋아합니다
그리움 담고 사는 나는

늦은 밤인데도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을 보면
그대 생각이 비처럼 
내 마음을 씻어 주고 있나 봅니다

비가 내립니다
내 마음에 빗물을 담아 
촉촉한 가슴이 되면 꽃씨를 뿌리렵니다
그 꽃씨는 당신입니다

비가 오면 우산으로 그리움을 살며시 가리고
바람 불 때면 진정 가슴으로 당신을 덮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빗줄기 이어 매고 
그네 타듯 출렁이는 그리움
창밖을 보며 그대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내리는 비는 우산으로 마저 가릴 수 있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은 진정 막을 수가 없군요
그냥 폭우로 마악 쏟아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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