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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의 천년고찰 반룡사

빈손 허명 2023. 5. 29. 10:17

경산에 천년고찰이 10개 가량 있는데 그중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용성의 반룡사가 내 마음을 끈다

지금은 은해사의 말사로 해해스님이 주지스님으로 있다

반룡사는 신라 태종 무열왕때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 하였다.

반룡사는 3곳이 있는데, 고령의 반룡사  나머지 하나는 평양에 있다고 하며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아들인 이두를 만든 설총은 유년을 이곳 반룡사 에서 보냈다고 한다.

신라 태종 무열왕 부부가 왕재를 넘어,설총모자와 함께 반룡사에 불공을 드릴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다음엔 왕재의 길을 걸으러 와야겠다

구룡산(九龍山) 반룡사(盤龍寺)는 신라 무열왕 7(661)년 경에 이 지역 출신 성사(聖師) 원효(元曉)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서, 창건 당시는 신라 삼국통일의 성업(業)을 달성하기 위한 호국도량으로, 우리나라 3대 반룡사 중 영남의 고찰로 알려지고 있다. 구룡산을 아우르는 반룡산은 신라시대부터 신라와 당시 압독국[押督國, 지금의 경산] 동반관계를 이루면서 신라 제 5대 파사왕[니사금] 제 6대 지마왕[니사금] 제 7대 일성왕 [(니사금]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달성하기 위하여, 또 642년, 653년에는 김유신(金庾信)과 김인문(金仁問)이 압량주[지금의 경산]의 군주와 총관으로 부임하면서, 제 29대 태종무열왕은 압량에 주병(州兵)을 모아 백제 대 정벌에 참여하였던 주 입성(入城) 통로로 이 고개를 왕재[王峴]라 하였다.고려시대 원응국사(國師, 1051~1144)가 운문사를 중창하고 문득 반룡산하에 이르러 빈산의 칡넝쿨을 걷어내고, 허물어진 사지(寺址) 를 일으켜 신흥사(新興寺)라 하자, 전국에 수많은 석학(碩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이 때 당대의 석학 이인로(李仁老, 1152~1220) 또한 반룡사에서 낙조(落照)의 아름다움을 엮은 산거(居)라는 시를 통하여 산사의 고즈넉함을 애절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1637년 자인현(慈仁縣)이 경주에서 복현(縣)되자 초대현감 임선백(任善伯, 1637~1641)은 이 모두가 선현의 공덕이라 하여 옛 조사(祖師)와 성사(聖師)의 은덕을 찾아 구룡산 아래 허물어진 사지(寺址)를 일으키고 조선 인조 14(1641)년에 계운(戒云), 명언(明彦)으로 하여금 선당(禪堂)을 세우게 하여, 이로써 60여년에 걸쳐 27대의 현감에 이르도록 무려 5개의 암자[내원암, 벽운암, 대적암, 은선암, 안적암]와 26동의 대가람을 완성하니 이에 반룡(盤龍)이 승천한 격이라 이름하여 반룡사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몇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웅장했던 옛 가람은 소실 되었으나 현재사찰은 1997년 이후 복원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효 (617-686)
신라 고승으로 통불교(원효종, 분황종, 해동종)를 제창하고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했다.
한국 고대사, 철학사, 사상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독창적 지식체계의 위상과 가치는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에서 꾸준히 재조명되고 있다.
설총(654-?)
원효대사의 아들로 자는 총지, 호는 빙월당, 시호는 홍유후이다.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맏아 보았으며 이두를 집대성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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