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고 고귀한 나무는 나이테가 빽빽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겨울의 끝자락, 찬바람을 맞으며 상광 편백숲을 걸었다. 우뚝 우뚝 서 있는 편백나무 숲 사이에 쌓아놓은 돌탑과 길가에 서 있는 아름드리 오동나무들, 그 나무들을 바라보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들을 생각했다.
마을마다 동구에 큰 나무가 서 있다.
대부분 느티나무들이 많고 더러는 팽나무, 소나무, 어쩌다 서어나무나 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서 있다.
봄이면 연두 빛 잎들로 치장하고 여름에는 무성한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의 쉼터를 제공하고 가을이면 온통 빛나는 낙엽으로 성장하고 있다가, 한 잎 두 잎 낙엽으로 떨어져 내리고 헐벗고 서 있는 나무,
그 나무들이 하나둘씩 단풍으로 물드는 계절,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고, 쇠락의 계절이며 봄은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다.
침엽수거나 활엽수를 떠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그 나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러시아의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나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사람이 나무 옆을 지나갈 때,
그 나무가 있고, 나무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지 않고,
어떻게 나무 옆을 지나갈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삶의 매 걸음마다,
방탕아까지도 경이롭게 느끼는 놀랄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 나의 삶에서도 나무는 그러했다. 오래 되었거나 아니면 기묘한 형상의 나무를 보면
나는 먼저 경탄하고, 그 나무에 등을 기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얼싸안기도 했다.
그래서 한참을 기대 있거나 껴안고 있으면 내가 나무가 된 듯한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나의 전 생애가 어쩌면 나무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살아 있다는 것조차도 기적이고 놀라움인 그 나무,
그 나무를 아름답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사람이 바로 헤르만 헤세였다.
“나무는 내게 언제나 제일 정교한 설교자이다. 나무가 대중이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갈 때 그리고 숲이나 삼림 속에서 살아갈 때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들은 따로 따로 서 있을 때 돋보인다.
그들은 고독한 사람과 같지만 어떤 잘못 때문에 슬쩍 도망친 은둔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 베토벤이나 니체 같은, 위대하면서도 고독한 그런 인물이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속에서는 세계가 살랑이고 그들의 뿌리는 무한無限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갖는 온갖 힘을 다해 단 하나만을 이룩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 내부에 도사린 법칙을 완수하고 자신의 참된 모습을 세우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아름답고 튼튼한 나무보다 더 신선하고 지혜로운 것은 없다. 나무 한 그루가 톱에 잘려 그의 벌거벗은 죽음의 상처가 햇빛에 들어나면, 그의 묘비墓碑가 되는 셈인 그 표면에서 그가 거쳐 온 역사 전부를 읽을 수가 있다.
그의 나이테와 옹두리에는 온갖 투쟁과 고뇌와 질병, 그리고 그가 맛보았던 온갖 행복과 성장의 과정이 성실하게 기록되어 있고, 고생스러웠던 해와 무성하게 자랐던 해, 그리고 잘도 견뎌냈던 공격과 참아냈던 폭풍이 모조리 씌어져 있다.
농사꾼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단단하고 고귀한 나무는 나이테가 빽빽하다는 사실, 가장 굳세고 힘차며 모범적인 줄기는 높은 산위나 항상 계속되는 위험 속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안다.
나무는 성스러운 존재이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
그들은 교훈과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개체를 무시하고 근원법칙만을 설교한다.
나무는 말한다. -나의 내부에는 하나의 핵核과 불꽃과 사상이 숨겨져 있다. 나는 영생永生하는 존재이다. 영원한 어머니가 나와 함께 감행했던 시도와 계획은 단 한번만의 일이다. 내 모습이나 피부에 새겨진 무늬도 단 한 번만의 일이며 내 가지의 하찮은 잎 새의 유희도 아주 미세한 흉터도 단 한 번만의 일이다. 나의 임무는 이 독특한 단 한번만의 일 속에서 영원한 것을 형성하고 보여주는데 있다.-
나무는 말한다. -나의 힘은 신뢰다. 나는 선조에 대해서도, 해마다 내게서 자라나올 수천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내 종자의 비밀대로 끝까지 살아갈 뿐이요,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나는 하느님이 나의 내부에 도사리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으며, 내게 부여된 과업은 성스럽다는 것을 믿는다. 이러한 신념으로 나는 살아간다.-
헤르만 헤세의 <나무>를 읽다가 보면 불현듯 나 자신이 나무가 되고 싶어진다. 어딘가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올 곧게 지켜 서서, 흐르는 세월을 구름과 바람, 그리고 비와 눈보라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나무,
소리를 내지 않는 말로 수많은 이야기, 가슴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무,
그 나무들이 이 깊은 밤, 바람결에 열린 창을 넘어와 내게 속삭이는 소리 들린다.
‘어서 내게로 와, 내가 그립지도 않아?‘
길위의 민문학......... 우리땅걷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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