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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과 깨침의 의미(지광스님)

빈손 허명 2007. 3. 10. 10:49

 

 

 

 



삶과 깨침의 의미



1. 마음과 몸의 법칙은 하나


  우리가 부처님 말씀의 가르침을 얼마나 내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다시 말해 부처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얼마나 깨침의 세계가 열려가고 있는가? 얼마나 부처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법당에 한 주일, 한 달, 일 년이고 다니면서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내나 주변사람들이 "절에 다니는 사람이 뭐 저래?" 이렇게 질책을 받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비난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욕 먹이는 것이다. 우리의 아들딸들이 밖에서 여러 가지 생활을 하면서 "저 아이는 뉘 집 아이야?"라며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꾸지람을 듣는다면, 그것은 누구를 욕 먹이는 것이겠는가? 부모님을 욕 먹이는 것이고, 조상님께도 부끄러움이 있게 된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스스로에게나 부처님께 죄송스러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꼭 유념해야 된다. 부처님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를 공부하면, 하나를 공부한 것만큼 깨치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 말씀 한 마디를 새겨서 내가 노력하고 수행하는 것이 부처님의 아들딸 된 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과 몸의 법칙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수학문제를 풀 때 아주 오랜 동안 암중모색으로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풀렸다, 노심초사하던 어떤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하면 어떻게 하는가? 당장 "아!" 하며 깨달음의 외침, 깨달음의 탄성이 흘러나온다. 부처님께서도 이 점을 굉장히 주목했다. 진언밀교 같은 데서는 모든 소리의 근본은 "아!"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무명을 찢고 솟아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소리다." 이렇게 묘사를 했다. 무명을 찢고 어둠을 깨고 터져 나오는 탄성의 소리, 그게 바로 모든 소리의 남상(濫觴)이라고 한다. 모든 소리의 시초라는 것이다. 모든 말들이 "아"로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아베체데, abcd, 그것만 봐도 모든 만상이 광명을 지향하여 어둠을 찢고 솟아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 가운데 "아!"라고 탄성을 올리는 순간, 우리 몸의 세포들도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2. 몸에서 나오는 광자


  참 재미있는 것은 전자(電子)인데 이것은 굉장히 주목해야만 되는 내용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지만 당장 숨이 넘어간다고 하면, 미래에 어느 집에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 누구네 집에 몇 번째 아들이나 딸로 태어날 게 정해져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이렇게 이해해 보면 될 것이다. 소립자 물리학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이른바 물질의 궁극의 세계, 극미의 세계를 알고자 피눈물 나는 혈투를 벌이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세포가 있고, 분자, 원자, 전자가 있다. 그런데 전자를 변속기라거나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서 깨뜨리고 나면 거기서 광자(光子)가 나온다.광자는 빛이다. 다시 얘기를 하면 전자를 깨뜨리면 빛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은 이 광자라고 하는 것은 10억 광년을 날라 간다 하더라도 에너지의 손상이 전혀 없는 아주 엄청난 입자이다. 과학자 존 벨(John Bell)의 실험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다. 그는 전자가 깨지면서 나오는 광자가 어떻게 날아가는가를 추적한 것이다. 날아가는 광자를 편광판이라는 것으로 막았다. 그랬더니 허공을 날아가던 광자들이 일제히 서 버리는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터져 나가면 그것을 막을 때 하나로 끝이 날 텐데, 광자의 세계에서는 하나를 막아 놓으니까 다른 것들이 전부 허공에 서 버렸다. 이 광자의 세계는 아주 미세한 세계, 전자보다 더 미세한 세계인데 이게 웬일인가? 학자들은 아주 놀랐다. 왜냐하면 하나의 광자가 가던 길이 막히니까 순간적으로 통신을 했다는 얘기가 성립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야, 누가 나를 막았어. 못 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래?"하면서 일제히 허공에 서 버린 것이다. 소립자들도 순간적으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어떠한 만상도 죽어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가면 갈수록, 미세한 세계를 연구하면 할수록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수상행식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모든 물질은 색(色)이요, 수(受)는 감각작용, 상(想)은 지각작용, 행(行)은 반응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식(識)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물질은 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광자라고 식이 없을 수가 없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계속 몸에서 반응을 일으키는 가운데 광자가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가 터지면서 나오는 이 광자는 하나의 코드를 가지고 있다. 무엇으로 우리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드릴까 연구를 하다가 성덕 바우만군이 생각났다. 기억이 날 것이다. 미국에 양자로 간 젊은 우리의 아들이 몹쓸 병에 걸렸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골수를 기증한다며 전 한국을 뒤집어 놓았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검사를 했는데 자기를 낳아준 엄마도 코드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끝내 한 사람을 찾아내 그 사람의 골수를 이식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대체로 그 병은 100% 다 죽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서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결혼을 한다고 나왔다. 수백만 가운데 코드가 맞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가? 알 수 없는 사람의 인자가 그와 같은 것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들의 몸에서 나오는 광자가 있다. 정말 마음을 잘 써야 된다. 이런 저런 잡지를 많이 보고, 외국 책들을 보면 "정말 마음 한 순간 잘못 쓰면 큰일 나겠구나!" 그런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광자는 전혀 에너지의 손상이 없다. 그리고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광자는 우리의 코드를 닮아 있다. 우리의 지문도 족문도 다 다르다. 요즘에 심지어 아들딸이 친자냐, 아니냐 조사할 때 유전자 검사를 한다. 코드가 같은지, 틀린지를 검사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몸은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물리적인 반응도 일으키므로 그때마다 우리의 몸에서 광자가 튀어나오고 이것은 사라짐이 없다. 십억 광년을 날아가도 사라짐이 없다. 우리의 몸에서 나온 광자는 우리의 코드를 가지고 있으므로 계속 허공에 있다. 내가 설명해 드리는 것은 광자뿐이지만 광자를 깨뜨리면 또 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문명은 광자 정도까지도 버거워한다. 그 밑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또 다른 차원이 있을 것이다.



3. 길을 만드는 깨침의 광자


  그런데 광자가 튀어나와서 허공 가운데 우리의 체성을 대변하는 길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등지게 된다고 하면 그 길을 따라서 갈 것이다. 그 길은 끼리끼리 연결되어 있다. 《화엄경》에 나온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당장 이 세상을 등진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속 쌓아올렸던 그 광자가 길을 열어서 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부정적인 코드라면 지옥으로 간다. 깨침, 깨뜨린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고도의 깨침이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 세계로 가는 길이 열린다. “불도(佛道)” 그러지 않는가? 부처님의 세계로 가까이 가는 광자를 만든다고 해 보자. 광자 이하의 단위를 만든다고 해 보자. 그러면 부처님 나라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면 하는 것만큼 자꾸 길이 열린다.


  《법화경》에 너무나 겁나는 얘기가 나온다. "절 한자리 하면 한자리 하는 것만큼 공덕이 쌓이고, 법문을 한자리 들으면 한자리 들은 것만큼 공덕이 쌓이며, 하나의 좋은 행동을 하면 좋은 행동을 한 만큼 공덕이 쌓인다." 그렇다. 좋은 행동을 하면 "아, 기분이 좋구나. 마음이 평안하구나." 이런 마음이 된다. 그러면 좋은 광자가 자꾸 만들어지는 것이다. 깨침의 사람은 누구인가? 부처님 말씀대로 "깨침의 사람은 광명의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 광자를 얘기했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이라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육안으로 밖에 보지 못한다. 눈은 천층만층이다.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이렇게 눈도 가지가지이다.

  《화엄경》에 보면 우리가 지금 눈이 멀어서 그렇지, 이 허공은 상적광토라 찬연한 광명에 감싸여 있다. 무명중생의 업 때문에 부처님의 찬연한 광명을 보고 있질 못한 것이다. 우리 눈이라는 것은 하잘 것 없이 썩어버리는 수정체로 된 것이라 부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심안(心眼)이 열리지 않아서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고, 남편의 마음을 모르고, 아내의 마음을 모르고, 마음을 보지 못한다. 수행자들이 항상 견성하라는 말은 ‘마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라’이다. 정말 중요하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열반은 무한한 광명이다. 극락이라는 세계도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찬연한 광명의 세계이니까 수명이 무량할 수밖에 없다. 중생세계는 중상모략하고, 헐뜯고, 비난하고, 자기가 잘났다고 난리를 치지만 그게 다 어둠이라는 것이다. 머리를 깎고 사는 사람이나 세속에 사는 사람이나 세속적인 일과 너무 관련되다보면, 고급스러운 지성을 가지고 고급스럽게 살도록 해야 되는데, 차원이 낮은 짓을 하면서 마(魔)가 붙고 사(邪)가 붙어서 삿된 길로 가게 된다.




4. 깨침은 빛을 선물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불자들, 수행자들은 누구이냐? 자기의 깨침을 통해서 세상에 빛을 선물하는 사람"이다. 어떤 깨침이 있을 때 "아, 그렇구나. 맞아."하며 탄성의 소리가 아주 강력할 때가 있다. 이렇게 탄성의 소리가 강할 때 몸에서 광자가 막 쏟아져 나온다. 그런가 하면 고요히 "아, 그렇지. 맞아." 이렇게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다. 조그마한 깨침부터 큰 깨침까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탄성을 울리는 순간까지는 쉬운가? 어려운가? 뭔가 반추하고 살아야 된다. 부처님 말씀을 열심히 실천해야 깨치고, 그럴수록 찬연한 광자의 세계가, 깨침의 세계가 온다. 전자가 터지면서 혹은 광자가 터지면서 나오는 미세한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길을 따라서 점차로 또 나아간다.

  이 우주의 만상은 전부 다 빛을 머금고 산다. 우리 스님들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그 사람이 수행을 했는가? "사리"라는 것도 스님들의 세계에서는 수행의 정도를 가늠하는 내용이다. 그것이 빛의 응결체라는 얘기도 한다. 진리의 세계를 얼마나 호흡했는가? 깨침의 세계, 해탈지견향을 잘 지키면 몸에서 향기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기가 튀어나온다는 것이 다 광파, 광자이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발사되는 것이다. 계(戒)를 잘 지키면 계의 광자가 나올 것이다. 정(定)을 잘 닦으면 정의 광자가 나올 것이다. 계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차원이 다르다. 깨침의 생활 속에 사는 사람들은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고 인상도 다르다. 사특한 얘기, 사악한 마음으로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겠는가? 많은 분들을 모시고 살면서 별의별 것을 다 체험하고 사는데 정말 사바세계에 와서 공부를 아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 평화를 선물하고, 기쁨을 주고, 광명을 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깨침의 사람들, 깨달음의 사람들은 그 몸과 마음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다르고, 쏟아져 나오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 광명을 선물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배움이 있고, 기쁨이 있고, 환희가 있고, 열락이 있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세계로 가고 있다. 각기 할 일이 있다. 등불이 50촉짜리 1000촉짜리 찬연한 등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때는 조그마한 촛불도 있을 수 있어서 그 나름대로 아름답고, 또 가스등은 가스등 나름대로 아름답다. 전등은 전등대로, 성냥불은 성냥불대로, 램프불은 램프불대로 또 우리가 갖고 있는 등불 모두가 의미가 다르다. 자신이 지금 찬연한 광명이 되지 않았다, 아직 성불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밝히고 있는 불 그대로 계속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도 "너의 근기 따라 최선을 다하라."라고 말씀했다. 모든 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름대로의 깨달음의 등불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면서 빛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촛불이 꼭 필요할 때도 있다. 찬연한 조명 등불이 어디나 다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조명이 좋다고 하더라도 커다란 샹델리아를 현관에 달아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삶의 군상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수행을 하면서 자꾸만 밝혀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광명을 선물하는 사람은 오랜 수행을 한 사람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점점 밝아져 가야 된다.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 아집의 포로가 된 사람, 나밖에 모르는 사람 등 아집이나 집착을 굉장히 배격하였다. 그 이유는 과거의 어떤 일에 포로가 되어 스스로 광명을 차단하는 사람, 어둠의 자식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밝아지려면, 성장 하려면 빛이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은 스스로를 어둡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 것을 불교에서는 무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아집이라고 하는 것,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파멸의 길이고, 자기학대의 길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정신분석학자들의 얘기도 마찬가지이다. 아집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정신적인 자기학대,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은 자기를 제한하고, 움츠리고, 속박하고, 자기를 학대한다.

‘기도는 매일 매일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다.’라고 한다. 새롭다는 것은 광명이요, 새롭게 살면 살수록 좋은 광자가 막 튀어나온다. 자꾸만 내 몸에서 광파가 튀어 나온다. 광파는 빛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밝게 산다는 것은 진리와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우선 밝다. 표정도, 말도, 생각도, 행동도 밝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광자를 찬연히 많이 뿜어낼 것이다.



5. 극락의 길을 만드는 광자


  《아미타경》에도 나오지만 우리가 "극락 가는 사람들은 아미타부처님과 그 권속들이 정말 데리러 올까?" 하시지만 이것만은 꼭 알아야 된다. 금생을 살아가면서 깨달음의 삶과 광명의 삶과 무량광 무량수의 삶을 살아보기 바란다. 그러면 어디로 길이 찬연히 열리겠는가? 내가 수행을 하면 할수록 그것이 점점 극락세계로 가는 길이다. 아미타부처님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여기 살아도 극락세계의 길이 열리는데, 아미타부처님께서 어떤 길로 오시겠는가? 내가 만들어 놓은 길 따라 그 분들이 오신다는 말이다.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정진하여 끊임없이 나오는 광자로 아미타 극락세계로 길을 짜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를 도 닦는 종교라고 한다.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대로 극미의 세계로 가면 갈수록 부처님 말씀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낸다. 법당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을 듣고 "아, 그래 그렇지" 이렇게 조용히 가슴 속에 얘기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미세한 반응으로 인해서 계속 광자는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쓸데없는 짓 하고, 중상모략하고, 배신하고 하는 것들은 전부 악도이다. 자신의 인생을 중요시 한다면 날마다 깨침의 삶을 살아야 된다.


  어떤 사람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 사람이 죄를 많이 지었으면 지옥에 있는 저승사자, 지옥사자들이 데리러 온다고 한다. 자기가 갈고 닦은 대로 그 세상에서 온다고 한다. 이것을 가만히 부처님 말씀과 광전자 가설에 맞춰 보면 내가 만들어 놓은 길 따라 그 사람들이 못 올 이유가 없다.《정토삼부경》에 나오는 얘기와 꼭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살지만 몸과 마음을 열심히 갈고 닦으면 내가 만들어 놓은 길 따라서 지금도 극락의 주민이라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악마와 같은 마음을 먹고 남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지금도 지옥에 사는 것이다. 악령들이 계속해서 그 길을 따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죽은 다음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지금이 문제인 것이다.


  요전에 상담을 하는데 “자기는 지금까지 남편에게 희생을 했는데 남편이 이럴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그런 얘기는 하지 않도록 하자. 누가 누구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은 너를 희생시킨 적이 없다”고 할 것이다. 즉, 서로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다. ‘내가 남을 위해서 희생했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희생이 아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남편이 자기에게 희생한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겠느냐고 말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너를 희생시킨 적이 없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아상이 너무 강한 것이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희생하는 게 인생이 아니다. 희생했다고 하면서 내가 남편에게 은혜를 베푼 것처럼 말하지만, 사랑은 은혜를 베푸는 게 아니다. 광명을 선물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깨달음의 마음이 있다면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광명을 선물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6. 패배와 비난 속에서의 성장


  우리가 흔히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많이 깨져야 된다. 우리는 모자람이 많기 때문에 항상 고통이 많다. 미국의 커빙 윌리암스는 유명한 야구 코치였는데 자기도 명 플레이어 출신인데 "선수들은 패배 속에서 더 크게 성장한다."고 말한다. 미국 프로야구의 맹장들은 이기는 것도 좋지만 지는 것에서 선수들의 불합리한 점을 더 찾아낸다는 것이다. 패배 속에서 자기를 더욱더 검토하게 된다. 왜 패했는가? 패배했을 때의 나의 잘못된 점, 그릇된 점은 무엇인가? 승리 속에서는 기분이 좋아서 별로 배움이 없다. 승리한 사람들은 과거에 많이 패배했던 사람들이다. 패배 속에서 성장한다. 깨졌을 때 상대방을 원망하고, 고통스러울 때 남을 원망하고, 이런 사람은 미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아직 자기 껍질을 깨뜨리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다음에 또 진다. 깨질 때까지 계속 그 사람은 져야 된다. 부처님은 그가 껍데기를 깨뜨릴 때까지 패배 속에서 가르침이 있게 한다.


  수행자들은 원래 고통을 사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과는 전혀 궤도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고생을 자처하는 사람은 어떤 고생이라도 참는다. 처음엔 가슴이 아프지만 "어휴, 중이 안 참으면 누가 참나?" 이러고 가는 것이다. 우리들도 "내가 불자인데 내가 안 참으면 누가 참나?" 그렇게 참아야 된다. 부처님도 계속 고통을 치르고 부처님이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결점에 과감히 직면하는 용기를 가져야 된다. 전자가 깨져야지 빛이 되는 것처럼 깨져야지 빛이 된다. 패배를 두려워 해서는 인된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자. 미국의 유명한 플랭클린 루즈벨트(F. Roosevelt)는 "패배를 연구하라. 그 속에 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틀린 문제를 연구하라, 그 속에 합격이 있다”와 똑 같은 얘기이다. 패배를 연구하라, 자신의 약점을 연구하라, 절대로 불운을 한탄하지 말라, 많이 풀어라, 많이 행동하라, 행동만이 공포를 치료한다, 유명한 심리학에 나오는 얘기이다.

  나도 능인선원을 처음 만들 때 정말로 애를 많이 먹었다. 처음에는 대여섯 명 모여서 얘기를 했었는데, 몇 십 명으로 늘어나니까 등골에 진땀이 났다. 그래서 여의도에 큰 교회를 가지고 계신 사람들도 예사는 아니고 엄청난 단계를 거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신도들 한 50명 정도 앉혀 놓고 얘기할 상황이 되니까 또 사람이 늘어났다. 한 100명쯤 되니까 진땀이 나고, 정신이 없고, 잠도 못 자고 그 기를 못 이기는 것이었다. "뭐 잘못하지 않을까? 말은 제대로 하는 것일까? 저 분들이 듣고 우습다고 안 그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또 얼마동안 견딜 만 하더니 몇 백 명 늘어나니까 진땀이 쏟아지고 팬티까지 젖어 들어가는데 몸살을 엄청 많이 앓았다.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게 예삿일이 아니다. 내년이면 23년이 되는데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다. 요전에 능인불교대학 1기생 대여섯 명을 만났는데 죄다 할머니가 되었다. 23년 전엔 젊었었는데 확연히 늙었다. 나 자신이 나이 먹는 것을 잘 모르지 않는가? 세월이라는 것은 금방 가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패배라거나 남에게서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W. Churchill)의 유명한 얘기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일생을 살아오면서 나에 대한 비평이 없었던 시기는 한순간도 없었다. 항상 나는 비판 속에서 성장했고 비난 속에서 발전했다." 지금도 우리가 위인의 한 사람으로 치지 않는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모두 다 불완전하므로 끊임없이 내가 할 일은 나의 깨달음, 깨침이다. 불평을 버려라! 우리들 스스로 패배라거나 비난에서 교훈을 얻을지언정 남에게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은 "남을 비난하지 말고 자기를 비난하라."이다. 그게 보통 중생과 다른 점이다. 남들이 나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평하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지언정 남을 가지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어떤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영원히 없으실 것이다. 능인선원 만들 때도 불비(不備)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는 것이다. 완전한 컨디션은 없지만 그냥 하는 것이다. 머리가 아파도, 골이 아파도, 몸이 아파도, 괴로워도 그냥 가는 것이다. 이 몸은 워낙에 고장이 잘나는 것 아닌가? 어떤 분이 몸이 약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강한 사람만 하는가? 약해도 죽을 때까지 가야 된다.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조건을 대지 말라고 하였다. 행동 속에서 공포를 치료해야 된다. 계속 행동을 하고 수행하면서 가면 아픔도 나아진다.


  명백한 사실은 절대로 완벽한 조건은 없다. 그냥 가는 것이다. 아파도 가고, 괴로워도 가고, 쓰라려도 가고, 슬퍼도 가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불완전하기 때문에 도리가 없다. 이 세상은 완전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세상에 광명이 되라!" "법을 실천하는 명인이 되라! 법을 펼치는 명인이 되라! 남보다 한 걸음 앞서기 위해 너는 법을 말하는 명인이 되라! 법은 사랑의 무기이며, 법문은 강해지는 문이다."이렇게 항상 말씀하였다.



7. 광명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말


  이집트에 파라오들의 무덤 피라미드가 있다. 쿠프왕의 피라미드에서 나온 책에 보면 유명한 잠언인데 “언어는 성공이나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문명은 언어와 함께 진보한다. 언어는 반감과 증오와 죽음조차도 초월하고, 언어에 의해 울거나 웃거나 사랑하기도 하며, 아름다운 언어에 의해 사람들을 다스리라!”이렇게 중요하고 유명한 말이 나온다. 옛날에 파라오들은 이것을 알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말에 의해서 나라를 다스리라.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이고 일가친척 간에도 아름다운 말, 빛을 뿜어내는 말을 하라! 법문은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면 자신만 간직하지 말고 뿜어야한다. 광명을 뿜어내야 한다. 법광이다. 법문은 법성광명이다. 법을 설하는 명인이 되라, 요설변재(饒舌辯才)하라.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끊임없이 이 세상을 광명으로 아름답게 만든 분이다. 그 분은 계속 가르치신 분이다. 이 지구상에, 우주상에 그 분처럼 법문하신 분 있는가? 무진장광설, 팔만사천대장경을 계속 가르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무엇인가? 20년 동안 초 하루날, 지장재일, 관음재일에 기도 했다. 신중님께 매달 기도하고, 지장보살님 전에 영가천도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그 다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을 해소시켜 달라고 구고구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했다. 이제는 우리가 원력을 가져야 한다. 금생에 열심히 정진해서 성불하겠다고 마음먹고 나가시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극락왕생해서 아미타부처님을 만나 뵙고 극락왕생하여 거기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불하겠다고 원력을 세울 수도 있다. 나를 깨뜨려야 된다. 누가 나를 비난한다면 그 비난 속에서 배워야 한다. 내가 누구에게 깨졌다 한다면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 불가에는 "묵언대처"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싸움이 벌어진다면 입을 꾹 다물고 그냥 앞으로 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상 입을 꾹 다물고 가라. 부처님께서는 "싸움은 거부할 때 이긴다."고 말씀하셨다.

  수사관들이 수사를 하다보면 범인이 변명을 한다고 한다. 잠언에 나오는 얘기인데 "변명은 증거다."이다. 즉 자기가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있으면 그것만 얘기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입을 꾹 다물어라. 《아함경》에 보면 남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자기도 사랑한다. 나의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남의 자기도 미워하는 것이다. 공격을 하는 것은 심성이 나쁜 것이다. 남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의 삶도 사랑하지 않는다. 공격자의 심리이다. 부처님의 경전에 "비난 받는 것을 항상 기뻐하라." "비난에 대해서 웃음으로 답하라." "침묵을 지키라." "하찮은 사람과 싸우기를 거부하라."는 말들이 이렇게 많이 나온다.



8. 깨침의 삶은 연꽃의 피어남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전자가 깨지면 광자가 나온다. 광자는 바로 우리들의 체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강아지는 어떤 범인이 떨어뜨리고 간 손수건의 냄새를 맡고 그 사람을 찾아낸다. 그런 것을 체크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내 몸에서 지금도 계속 광자가 터져 나오니까 전자가 계속 반응을 하면서 껍데기가 깨진다. 계속 길을 만들고 있다. 남을 험담하지도 말고, 비난하지도 말고, 그저 나의 갈 길을 열심히 가면 된다. 우리가 당장 수명을 거둔다 하더라도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리의 체성을 닮은 길이 그냥 열려버린다. 지금도 다 열려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정말 바르게 살아야 한다. 깨침의 삶을 살아 보기 바란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 피지 않는가? 더러운 곳에서 피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연꽃이다. 깨침의 세계는 연등의 세계이다. 연꽃은 정말 묘한 꽃이다. 어떻게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가?


  순간순간마다 우리들의 몸에서 계속 광자가 튀어 나온다. 길을 만들고 있다. 일념즉시무량겁이다. 정말 깨침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 지금도 우리들은 영원의 길을 만들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극락 가는 길을 만들거나, 지옥 가는 길을 만들거나 양단간에 가고 있다. 깨침의 삶, 깨달음의 삶이 되어야 된다. 전자도 내 전자 네 전자가 다르다. 내가 지어서 남이 받는 법이 없고, 남이 지어서 내가 받는 법이 없다. 내가 지은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의 주민이 되어 내가 길을 닦았는데, 그 분이 그 길 따라서 못 오실 이유가 없다. 내가 길을 잘못 내면 그 분이 못 오시기 때문에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내가 지옥으로 길을 닦아 놓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와 버린다. 진지한 자세로 바른 길 따라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몸과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정진하는 깨침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출처 : 김경진이 바라보는 세상
글쓴이 : 김경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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