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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씨이야기

빈손 허명 2005. 5. 6. 22:26

  이름사랑 - 성씨 본관 - 관향

성씨 이야기

 

☞ 방송    성씨 이야기   배우리 교수 출연

KBS 2R  FM 106.1 매주 토요일 아침 5시 30분)

(또는 KBS 3R  AM  639   매주 토요일 아침 6시 30분)

성씨 본관별 인구   우리 성씨의 역사  귀화성씨

우리 나라 성씨의 수

성씨의 종류

성씨의 본관과 땅이름 더 자세히

한국의 성씨 727개

보도

성씨의 두음법칙 적용(류→유)

성을 창시한 외국인들

쓰기에 불편한 성씨들

새 본관 잇단 탄생

본관성씨별 집성 지역

각 성씨별 로 자세히 알기

김씨 (김해)

박씨 (밀양)

석씨 (월성)

성씨 (창녕)

신씨 (평산)

안씨 (순흥)

이씨 (전주 벽진 성주 영천 전의)

조씨 (풍양) 

 

우리 나라 성씨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剛) 강(疆) 개(介) 견(堅) 견(甄) 경(景) 경(慶)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교(橋) 구(丘) 구(具) 구(邱) 국(國) 국(菊) 국(鞠) 군(君) 궁(弓) 궉(   )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난(欒)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누(樓)

단(段) 단(單) 단(端) 담(譚) 당(唐) 대(大) 도(道) 도(都) 도(陶) 돈(敦) 돈(頓) 동(董) 두(杜) 두(頭)

단(段) 단(單) 단(端) 담(譚) 당(唐) 대(大) 도(道) 도(都) 도(陶) 돈(敦) 돈(頓) 동(董) 두(杜) 두(頭)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모(牟) 모(毛) 목(睦) 묘(苗)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房) 방(方) 방(邦) 방(龐)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변(邊)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빙(氷)

사(史) 사(謝) 사(舍)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석(昔) 석(石) 선(宣) 설(卨)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淳) 순(荀) 순(舜)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愼) 신(申) 신(辛)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영(影) 영(榮) 영(永) 예(芮) 오(吳)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雲) 운(芸)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柳) 유(兪) 유(劉)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음(陰) 이(李) 이(異) 이(伊)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章) 장(莊) 장(蔣) 저(邸) 전(全) 전(田) 전(錢) 전(傳) 점(占) 정(丁) 정(程) 정(鄭) 제(諸) 제(齊) 조(趙) 조(曺) 종(宗) 종(鍾) 좌(左) 주(周) 주(朱) 준(俊) 지(智) 지(池) 진(晋) 진(眞) 진(秦) 진(陳)

차(車) 창(昌) 창(倉) 채(蔡) 채(菜) 채(采) 천(千) 천(天) 초(楚) 초(肖) 초(初) 최(崔) 추(秋) 추(鄒) 춘(椿)

탁(卓) 탄(彈) 태(太) 판(判) 팽(彭) 편(扁) 편(片) 평(平)

포(包) 표(表) 풍(馮) 피(皮) 필(弼)

하(河) 하(夏) 학(   ) 한(漢) 한(韓) 함(咸) 해(海) 허(許) 현(玄) 형(邢) 호(扈) 호(胡) 호(鎬) 홍(洪) 화(化) 환(桓) 황(黃) 후(侯) 후(後) 흥(興)

강전(岡田) 남궁(南宮) 독고(獨孤) 동방(東方) 망절(網切) 사공(司空) 서문(西門) 선우(鮮于) 소봉(小峰)

장곡(長谷) 제갈(諸葛) 황보(皇甫)

 

    우리 나라의 성씨와 그 본관  

 

賈가씨(소주), 簡간씨(가평), 葛갈씨(남양), 甘감씨(회산), 姜강씨(진주), 康강씨(신천) 彊강씨(진주), 强강씨(충주), 剛강씨(충주), 介개씨(여주), 堅견씨(천녕), 甄견씨(황간)
慶경씨(청주), 景경씨(태인), 桂계씨(수안), 高고씨(제주), 曲곡씨(용궁), 孔공씨(곡부)
公공씨(김포), 郭곽씨(현풍-청주), 具구씨(능성), 丘구씨(평해), 邱구씨(은진), 國국씨(담양), 菊국씨(영광), 鞠국씨(담양), 君군씨(남원), 弓궁씨(토산), 權권씨(안동-예천)
斤근씨(청주), 琴금씨(봉화), 奇기씨(행주), 箕기씨(행주), 吉길씨(해평)

金김씨(김해-경주-광산-김령-구안동-신안동-의성-강릉-선산 -청품-삼척-연안-청도-상산-전주-부안-순천-나주-월성 -언양-울산-영광-청주-서흥-함창-도강-광주-개성-진주 -안산-고령-수원-영산-고성-용궁-금산-예안-풍산-원주 -밀양-충주-공주-영양-강화-경산-양근-수안-해평-낙안 -통천-안성-당악-양주-영천-양산-남양-진천-우봉-희천 -파평-배천-용담-강서-김제-교하-정주-무장-풍천-진도 -문화-영월-해풍-홍주-해주-안악-사천-보령-덕수-창원 -대구-야성-해남-신천-영해-풍기-영암-칠원-설성-안로 -태원-동래-은율-금화-부평-평산-웅천-청송-진잠-창평-정산 -오천-연기-우록-성주-용궁)

羅나씨(나주-금성-군위-안정), 南남씨(영양-의령-고성), 南宮남궁씨(함열), 浪낭씨(양주), 乃내씨(개성), 奈내씨(나주), 盧노씨(광주-해주-신창-곡산-만경-안강-안동-장연-풍천), 魯노씨(함평), 雷뇌씨(교동)

單단씨(연안), 端단씨(연안), 唐당씨(밀양), 大대씨(밀양), 都도씨(성주), 道도씨(고성)
陶도씨(풍양), 獨孤독고씨(남원), 頓돈씨(목천), 敦돈씨(청주), 董동씨(광천), 東方동방씨(진주), 杜두씨(두릉)

路로씨(개성), 柳류씨(문화-고흥-진주)

馬마씨(목천-장흥), 麻마씨(영평), 萬만씨(개성), 梅매씨(충주), 孟맹씨(신창), 明명씨(서촉), 牟모씨(함평-광주), 睦목씨(사천), 墨묵씨(광령), 文문씨(남평), 門문씨(인천) 米미씨(경성), 閔민씨(여흥)


朴박씨(밀양-반남-함양-순천-무안-죽산-고령-충주-영해-월성-상주-진원-울산-강릉-춘천-음성-창원-태안-영암-고성-구산-면천-삼척-은풍-의흥-태인-나주-상산-문의-선산-전주-봉산-비안-운봉-순창-군위-여주-인제-평산-평주-평택-노성-사천-광주-거제)

潘반씨(거제), 班반씨(개성), 方방씨(온양), 房방씨(남양), 龐방씨(개성-대원), 邦방씨(광주), 裵배씨(달성-분성-성산-성주-흥해-곤산-곤양), 白백씨(수원), 范범씨(금성), 凡범씨(안주), 邊변씨(원주), 卞변씨(초계), 卜복씨(면천), 奉봉씨(하음), 夫부씨(제주)
彬빈씨(대구), 賓빈씨(달성), 氷빙씨(경주)

史사씨(청주), 謝사씨(진주), 舍사씨(광산), 司空사공씨(효령), 森삼씨(삼가), 尙상씨(목천), 徐서씨(달성-이천-대구-남양-부여-연산-장성-절강), 西서씨(진주), 西門서문씨(안음), 石석씨(충주-해주), 昔석씨(월성), 宣선씨(보성), 鮮于선우씨(태원), 薛설씨(경주-순창), 葉섭씨(경주), 成성씨(창녕), 蘇소씨(진주), 邵소씨(평산), 孫손씨(밀양-평해-경주-청주-안동),

宋송씨(진천-여산-은진-용성-양주-문경-덕산-야성-연안-청주- 홍주-남양-김해-신평), 水수씨(운제), 舜순씨(파주), 荀순씨(홍산), 承승씨(연일), 昇승씨(남원), 施시씨(절강-태인),

申신씨(고령-평산-영산-거창-아주), 沈심씨(청송-풍산-삼척)

阿아씨(양주), 安안씨(순흥-광주-탐진-태원-죽산), 夜야씨(원평), 梁양씨(남원)
楊양씨(남원-청주), 魚어씨(함종-충주), 嚴엄씨(영월), 呂여씨(함양-성산), 余여씨(의령), 延연씨(곡산), 燕연씨(정평), 連연씨(전주), 廉염씨(파주), 芮예씨(부계),

吳오씨(해주-평해-군위-전주-낙안-장흥-함평-화순-흥양-울산-동복-보성-고창-나주-연일)
伍오씨(백천), 玉옥씨(의령), 溫온씨(봉성), 邕옹씨(순창), 王왕씨(개성-제남), 姚요씨(수원), 龍용씨(홍천), 禹우씨(단양), 于우씨(목천), 雲운씨(함흥), 元원씨(원주), 袁원씨(비안), 魏위씨(장흥), 韋위씨(강화),

柳유씨(문화-고흥-진주), 兪유씨(기계-창원-무안-강진-고령-안동-천령), 庾유씨(무송), 劉유씨(강릉-배천-거창),

陸육씨(옥천),

尹윤씨(파평-칠원-해남-해평-예천-영천-무송-함안-양주-남원), 殷은씨(행주), 陰음씨(죽산)

 

李이씨(전주-전의-광주-용인-함평-광산-광평-진안-온양-덕은-양주-김포-화산-부안-양성-진성-가평-안성-우봉-평산-고령-안산-정선-대흥-학성-서림-상산-남평-청송-차성-서산-해남-단성-영해-담양-익산-양산-울산-순천-동성-아산-청해-우계-흥양-진주-봉산-수원-태안-충주-창령-진위-결성-부평-덕산-나주-경산-영천-경주-장수-재령-덕수-한산-연안-신평-성주-청안-하빈-홍주-예안-금구-부여-용궁-임강-여주-영천-합천-고성-원주-청주-인천-회덕-음죽-인제-통진-수안-평창-안악-개성-강진-성산-공주-강화-함안-고부-벽진-장기), 伊이씨(태원), 異이씨(밀양), 印인씨(교동)
林임씨(평택-나주-울진-조양-진천-익산-옥구-경주-선산-옥야 -안의-부안-은진-예천-장흥), 任임씨(풍천-장흥)

 


慈자씨(요양),

張장씨(인동-안동-흥성-단양-결성-덕수-순천-옥구-부안-전주-울진-나주-목천-구례-예산-진천-청송-진안-지례-흥양), 蔣장씨(아산), 章장씨(거창), 莊장씨(아산),

全전씨(정선-감천-안동-경주-계림-기장-나주-성산-성주-옥산-경산-옥천-완산-용궁-천안), 田전씨(담양), 田전씨(남양), 錢전씨(문경),

鄭정씨(동래-진양-청주-해주-경주-연일-하동-초계-나주-김포-금성-서산-고성-함평-온양-봉화-장기-영덕-야성-광주-전주-청산-곤양-서경), 程정씨(하남), 丁정씨(압해)
諸葛제갈씨(남양),

趙조씨(한양-함안-평양-풍양-배천-임천-태원-김제-양주-횡성-평산-진보-직산-옥천-순창), 曺조씨(창녕),

左좌씨(청주), 宗종씨(니파), 鍾종씨(영암), 周주씨(상주-초계-안의-철원), 朱주씨(신안-능성), 俊준씨(청주), 池지씨(충주), 智지씨(봉산), 陳진씨(여양), 秦진씨(풍기), 晉진씨(남원), 眞진씨(서산)

車차씨(연안), 昌창씨(공주), 倉창씨(아산), 蔡채씨(평강), 千천씨(영양), 天천씨(연안)
肖초씨(제주), 楚초씨(성주)
崔최씨(경주-전주-강릉-통천-우봉-해주-초계-수원-동주-삭령-탐진-수성-화순-양천-용강-충주-양주-낭주-개성-청송-용주-영천-청주-황주-상주-한남-원주-직산-용궁-간성-곡강-흥해-고부-광주-부안-상원-영흥-완산-계림-태인-아산-연풍-강화)
秋추씨(전주)

卓탁씨(광산), 彈탄씨(해주), 太태씨(남원-영순-협계)

彭팽씨(용강), 平평씨(충주), 片편씨(절강), 表표씨(신창), 馮풍씨(임구), 皮피씨(괴산-단양-홍천), 弼필씨(대흥)

河하씨(진양), 夏하씨(달성), 韓한씨(청주-곡산), 咸함씨(강릉), 許허씨(양천-김해-태인-하양), 玄현씨(연주), 邢형씨(진주), 扈호씨(전주), 洪홍씨(남양-풍산-부계-풍산-홍주), 化화씨(진양), 黃황씨(창원-평해-장수-상주-우주), 皇甫황보씨(영천)

 

 

 성씨의 유래 및 본관

 

김(金)씨의 유래

김씨는 우리 나라 인구중에서 가장 많은 성씨로서 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수로왕계(김해 김씨)와 신라 왕실의 박, 석, 김 3성 중의 하나인 김알지계로 나눌 수 있다.

김씨의 본관은 "씨족통보"에 623본으로 나타나있으며 이중 김알지계의 김씨는 600여개의 본관이 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280여개의 본관이 있었다.    

또 다른 김해 김씨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왜장이 조선에 귀화하여 만든 김해(사성) 김씨가 있다.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중 인구가 가장 많으며 1985년에 8,785,554명이 있었다.

- [ 김알지계 김씨의 유래 ]

가평 감천 강남 강동 강릉 강서 강원 강주 강진 강화 개성 거창 결성 경기 경남 경북 경산(京山) 경산(慶山) 경상 경주 계림 고령 고부 고산 고성 고양 곡성 곤양 공주 광명 광산 광성 광양 광주 광천 광해 괴산 교하 구례 금릉 금산 금정 금평 금화 김녕 김성 김제 김천 김해(가락) 김해(우록) 김해(법흥) 김화 나주 낙안 남양 남원 남평 남포 남해 능주 달성 담양 당산 당악(해남) 당악(唐岳) 대구 대영 대전 덕산 덕수 도강 도광 동래 동양 등주  무송 무안 무장 무주 문경 문산 문화 밀양 백천 별성 보령 보성 봉산 봉화 부안 부여 부평 북실 분성 사창 사천 삼척 상산 상승 상주 서산 서울 서흥 선산 선성 설성 성남 성산 성선 성은 성의 성주 성천 수성 수안 수원 수주 순창 순천 순흥 승산 승평 신성 신안 신천 신평 안로 안동(구) 안동(신) 안산 안성 안악 안양 안흥 야성 양근 양금 양산 양주 양평 언양 여주 연기 연산 연성 연안 연주 연풍 염포 영광 영덕 영동 영산(永山) 영산(靈山) 영상 영암 영양 영월 영일 영주 영천 영해 예산 예안 예천 오천 옥산 옥천 온양 온전 완산 용광 용궁 용담 용산 용성 용인 우록 우봉 울산 웅천 원양 원주 월성 유성 은성 은율 은진 의령 의성 의주 의흥 이양 이천 인동 인천 일성 임진 인파 장성 장수 장연 장학 장흠 적성 전남 전북 전의 전주 정산 정선 전읍 정주 제주 죽산 중화 진도 진산 진성 진영 진위 진잠 진장 진주 진천 진해 창녕 창원 창평 천안 칠성 철원 청덕 청도 청산 청송 청양 청주 청평 청풍 초계 춘양 춘천 충남 충주 칠원 태원 토산 통천 파주 파평 평강 평산 평양 평창 평택 평해 풍기 풍덕 풍산 풍천 하음 한남 한산 한성 함안 함양 함영 함창 함평 함흥 합천 해남 해동 해주 해평 해풍 현풍 홍주 홍천 홍해 화성 화순 황산 황주 흥덕 희천

 

 이(李)씨의 본관

총 240개의 본관과 1,418,945가구 5,985,554명이 있다.(1985년)

가리 가평 간성 강동 강릉 강양 강진 강화 개성 거창 결성 경기 경남 경북 경산 경성 경주(월성) 경준 경진 계령 계룡 계양 고구 고령 고부 고성 고양 고창 고흥 곡산 공산 공주 광산 광양 광주 광평 (선산)  괴산 교하 군위 금구 금산 금성 기장 (차성) 김천 김포 김해  나주 남양 남원 남평 농서 농성 단성 단양 담양 당진 대전 대흥 덕산 덕수 덕순 덕원 덕은 덕찬 덕흥 동래 동령 동성 (사천)  동평 마산 문신 문안 문화 밀양 백성 백천 벽산 벽진 보성 보은 봉산 부안 부여 부평 사천 삼척 상산 상주 서림 서산 서천 선산 선성 성산(광평) 성산 성주 성준 수안 수원 순천 순흥 승평 신령 신평 신풍 아산 안동 안산 안성 안악 안양 안평 양동 양산(梁山) 양산(陽山) 양성 양주 양평 여강 여주 여흥 연극 연산 연안 연일 연천 영광 영양 영월 영일 영주 영준 영천(寧川) 영천(永川) 영춘 영해 예산 예안 예천 오현 옥천 온양 완산 여산 용궁 용인 용천 우견 우계 우봉 울산 원산 원주 은진 음죽 의령 의성 이천 익계 익산 익흥 인제 인주 인천 임강 임천 장기 장성 장수 장천 장흥 재령 전원 전은 전의 전주 정선 정주 제주 증평 진보(진성)  진안 진위 진주 진해 차성(기장) 창녕 창원 천안 철성 청도 청송 청안 청양 청주 청평 청해 초산(정읍) 춘천 충남 충주 칠성 태안 태원 토산 통진 평산 평양 평창 평택 평해 풍천 하동 하빈 하산 하음 학성 한산 한성 한양 함경 함안 함양 함평 함풍 함흥 합천 해남 해령 해주 행주 헌양 홍성 홍주 홍천 화산 화평 황주 회덕 회양 흥양

 

  박(朴)씨의 유래

강남 강릉 강원 강진 경주 고령 고성 고흥 공주 광산 광주 구산 군위 김해 나주 난포 남양 남원 남주 남평 노성 단양 달성 담양 대천 덕원 덕진 면천 영성 무안 문의 문주 문화 미산 밀양 반남 보성 봉산 부산 부안 비안 사천 삼척 삼화 상산 상성 상영 상주 선산 설성 성신 성주 수원 순창 순천 순흥 안동 안성 압해 야성 언양 여수 여주 연안 영암 영양 영월 영천 영해 영흥 예천  운봉 울산 월성 은풍 음성 의령 의성 의형 의흥 이산 인제 인천 일성 임실 장성 장흥 전주 정선 정승 정주 제주 주계 죽산 증평 진안 진주 진주 진흥 창녕 창원 천안 청송 청주 초계 춘천 충주 태안 태인 평산 평양 평주 평택 하명 한산 한양 함인 함양 함열 함흥 해남 해명 해주 현천 현풍 총 127개의 본관과 3,435,640명이 있다.(1985년)

[유래]

신라가 생기기 전에 여섯개의 마을(6부)에 촌장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

2.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 -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3.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

4.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있다)

5.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

6.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

기원 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 때 남쪽을 보니 양산 아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알이 있어서 알을 깨어보니 그 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갈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얼굴과 입술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아이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알영(閼英)이라고 했다.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되고 알영을 왕비로 삼았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과 일성왕(신라 7대)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관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신라 55대)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 반남, 진원 박씨 등

-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 박씨

-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 삼척 박씨 등

-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 음성, 고성 박씨

-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주, 충주 박씨

-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 무안 박씨

-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 춘천 박씨 등

-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경주 박씨의 8대군파와

-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 울산 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46개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대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는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 순위는 275성 중 역시 김씨, 이씨, 다음으로 제3위였다.

 

 장(張)씨의 유래

결성 경주 고성 광주 구례 나주 남양 남원 단양 담양 당진 대구 덕수 동래 목천 밀양 백천 봉산 봉성 부안 부여 순창 순천 순흥 안동 안성 안양 영안 영동 영천 예산 옥구 옥산 옥천 울진 인덕 인동 장수 장흠 전주 절강 제주 지례 진안 진주 진천 창녕 천녕 청송 청주 춘천 충주 태원(충주) 평택 훙덕 한양 함평 해주 해풍(풍덕) 흥성 흥양 흠해

총63개의 본관과 810,231명이 있다.(1985년)

우리나라의 모든 장(張)씨는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크게 3 갈래로 볼 수 있다.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용은 아랍(이슬람)계의 사람으로 고려 고종 때에, 절강 장씨의 시조 장해빈은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에,

안동 장씨의 시조 장정필의 선조는 신라 말에 각각 중국에서 들어 왔으며, 그밖의 대부분의 장씨는 안동 장씨에서 분관되었다. 그러나 흥성, 나주, 순천, 진천 등은 장유를 시조 또는 선조로 하고 있으나 서로 시기나 내용이 맞지 않는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장보고 등 장씨 성을 가진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들의 본관과 계통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배씨(裵氏)의 유래

사로(斯盧:서라벌)의 육촌(六村) 중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陀)를 시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료가 전하지 않아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모신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나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기록에 따르면, 배씨는 현경(玄慶)의 증손 사혁(斯革:가락군)에게 아들 4형제가 있어 맏아들 원룡(元龍)은 분성(盆城), 둘째 천룡(天龍)은 성산(星山), 세째 운룡(雲龍)은 달성(達城), 네째 오룡(五龍)은 흥해(興海)로 나뉘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배씨는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77,580가구에 323,0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산(京山), 경주(慶州), 곤산(昆山), 김해(金海), 남해(南海), 달성(達城), 대구(大丘), 분성(盆城), 성주(星州), 영암(靈巖), 협계(俠溪), 흥해(興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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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씨 표기 ‘류’ 아닌 ‘유’

호적부의 성명란에 ‘柳’씨 성의 한글 표기는 ‘류’가 아닌 ‘유’로 해야 한다는 대법원 해석이 내려졌다.

대법원은 "30년간 ‘류’로 사용해온 성의 한글표기가 최근 여권 재연장 신청을 하면서 ‘유’로 바뀌었다."며 류모씨가 대법원 홈페이지에 올린 질문에 대해 "94년에 제정되고, 96년에 개정된 호적예규에 따라 한글표기를 '유'로 한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11월 9일 밝혔다.

대법원은 “호적에 한자로 된 성을 한글로 기재할 때는 한글맞춤법에 의해 표기하도록 규정된 호적예규에 근거해 '柳·李·羅'를 호적에 한글로 표기할 때는 두음법칙을 적용, '류·리·라'가 아닌 '유·이·나'로 표기한다."고 설명했다.

류씨 종친회측은 “성표기는 고유명사이며 두음법칙에 해당되지 않는다.”면서 “호적예규 개정운동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04.11.9 서울신문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참고: 두음법칙 적용을 받는 성씨들

李氏(이 *'리'가 아님)  盧氏(노 *'로'가 아님)  硫氏(유 *'류'가 아님)  羅氏(나 *'라'가 아님)  

呂氏(여 *'려'가 아님)  林氏(임 *'림'이 아님)  梁氏(양 *'량'가 아님)  廉氏(염 *'렴'이 아님)  

龍氏(용 *'룡'이 아님)  

 

 

  우리 성씨의 역사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시대의 성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족    보  

 

족보의 의의

족보(族譜)는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로 시조(始祖) 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수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이에따라 옛날부터 족보는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번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가 해방후의 서양화와 지금의 핵가족 제도가 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만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서, 또 지금도 '근본이 없는 사람' 으로 치부되었을 때 그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족보는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 이다.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켜온 족보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야 할 것이다.


족보의 역사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심지어는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곳이 있는 등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 해온 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성씨 관계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것은 한(漢) 나라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기원전 1122년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 이라고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중화사상에 물들은 일반적인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의 격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족보의 종류

1.대동보(大同譜) - 같은 시조 아래에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가지고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하여 만든 족보책이다.

2.족보(族譜), 종보(宗譜) - 본관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한 족보책으로, 한 가문의 역사와 집안의 계통을 수록한 책이다.

3.세보(世譜), 세지(世誌) - 한 종파 또는 그 이상이 같이 수록되어 있거나, 한 종파만 수록된것을 말하며 동보(同譜), 합보(合譜)라고도 한다.

4.파보(派譜), 지보(支譜) - 시조로 부터 시작하여 한 종파만의 이름과 벼슬, 업적 등을 수록한 책이다. 이들 파보에는 그 권수가 많아 종보를 능가하는 것도 적지 않다. 파보는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증가되어가고, 그 표제에 연안김씨파보, 경주이씨 좌랑공파보, 순창설씨 함경파세보 등과 같이 본관과 성씨 외에 지파의 중시조명 또는 집성촌, 세거지 지명을 붙이고 있으나, 내용과 형식에서는 족보와 다름없다.

5.가승보(家乘譜) - 본인을 중심으로 수록하되, 시조로부터 자기의 윗대와 아랫대에 이르기까지의 이름과 업적 ,전설,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족보 편찬의 기본이 된다.

6.계보(系譜) -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낸 도표로서, 한 씨족 전체 또는 한 부분만을 수록한 것이다.

7.가보(家譜)와 가첩(家牒) - 편찬된 형태, 내용에 상관없이 동족 전부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킨다.

8.만성보(萬姓譜)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국내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줄기를 추려내어 모아놓은 책으로 모든 족보의 사전 구실을 하는 것이다. 『청구씨보(靑丘氏譜)』, 『잠영보(簪纓譜)』,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9.기타 - 『문보(文譜)』,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 『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와 같이 현달한 조상의 세계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나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등과 같이 조상 중 충, 효, 절, 의가 특히 뛰어난 사적과 공훈을 수록한 것도 있다. 또한,  환관(내시) 사이에도 계보를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이 다른 자손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를 보존하고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