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지**/내고향경산

천년고찰 반룡사

빈손 허명 2021. 12. 25. 19:33

오늘은 올겨울 가장 춥다는 예보로....

집콕하고 있다가 2시 넘어 집을 나섰다

경산에는 미나리 하는 곳이 여러곳이 있는데 제일 먼저 시작한 곳이 경산의 오지 용성 육동이다

경산.. 비오재란 재를 넘어가면 작은 마을 6개가 온기 종기 모여 살고 있는 물좋고 공기 좋은곳...

용성 육동..

나의 지인께 미나리 맛을 보여 드리려 언제부터 수확이 되는지도 알아볼겸  그리고 

경산 천년고찰 반룡사도 들릴겸... 아내와 출발하였다

육동 미나리는 아직... 1월 중하순이 지나야 나올듯 하여 반룡사로...

반룡사는 오랜만에  찾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후 대학도 떨어지고 산에 들어가 내년 예비고사를 준비한다고...

1978년 3월 어느날 이불 보따리를 올려매고 버스를 타고 첩첩 산중 반룡사로 들어갔었다

그땐 고시생이나 재수생이 절로 들어가 공부를 많이 하였었다

고생고생 찾아 갔었는데.... 스님이 방이 없어 용성 영원사란 절로 빨리 가라고 하신다

그땐 버스가 한대 들어가면 오후 늦게 그 버스가 되돌아 오는...

그렇게 반룡사를 잠시 갔었던...

요즘은 경산 손님이 왔을때 모시고 구경시키고 있는 경산을 알리는 천년고찰 반룡사이다

 

해동 3대 반룡사 (평양, 고령, 경산)의 하나인 신라시대 고찰 경산 반룡사는 아름다운 낙조로 유명하다.

또한 반룡사는 낙산사(동해), 보리암(남해), 보문사(서해)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4대 관음도량이다

 

반룡사는 경북 경산시 용전면 구룡산 자락(반룡산)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설총 키워낸 원효스님 주석처, 구룡산(九龍山) 반룡사(盤龍寺) 그 옛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즈음 경세(經世)를 실천해 나갈 이념적 토대와 이를 전파해나갈 새로운 기능, 즉 문자가 필요했다. 설총이 우리 고유의 이두(吏讀)를 만들기 전까지 아직도 신라는 어려운 중국의 문자를 쓰고 있었으며 이를 타파할 새로운 문자의 창안이 시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아들로 잘 알려진 설총이 이두를 고안해내어 신라가 불교 뿐 아니라 유학까지 깊이 연구하게 돼 국가의 기틀을 잡아나가는데 크게 일조했으며 우리 선인들의 문자생활을 비롯한 우리 문화의 발전을 한층 앞당겼다. 이는 원효스님이 요석공주를 만나기 전 저자거리를 돌며 “어느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며 노래했던 그 의미가 아마도 설총을 생산함을 예견해 나라의 기둥을 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또 훗날 설총이 저 유명한 ‘화왕계’를 지어 스스로 백두옹을 자처하고 임금에게 간하고자 했던 것도 원효스님의 그러한 뜻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국가의 동량인 설총을 키워낸 반룡사도 원효스님과의 깊은 인연 때문에 설총의 유년을 여기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정신적 귀의처인 일개 사찰이 얼마나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더구나 신라의 임금과 왕후가 인근 왕재(王峙)를 넘어 이 곳에서 설총 모자와 함께 불공을 드릴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으니 반룡사가 차지하는 위상도 상당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반룡사는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억불정책과 화재로 인해 쇠락을 거듭해 왔다. 일제 격변기 속에서 거의 멸실되다시피 한 반룡사가 다시 제3의 중창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사하촌인 인근 용전마을까지 모두 사역에 해당되던 반룡사는 고작 480여평 정도의 경내지만 남아있으나 가람을 하나둘 중건하고 구룡산 자락에 작은 길도 내어 ‘해동 3반룡사(평양, 고령, 경산)’라는 명성을 이어가는 토대를 닦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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