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1편
초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북의 도발로 발발했는데요, 덕정리가 고향인 나는 길가 큰 느티나무 밑에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을 하여 뛰어나가 봤더니 동두천 쪽에서 남부여대하여 하얗게 뛰어오는 피난민들을 보고 밥짓는 어머니에게 피난 가자고 조르던 생각이 납니다.
멀리 논에 일 가신 아버지를 찾아와 지게에 이불 ,옷가지, 그 위에 보리밥 하던 것을 솥째 실고 그 위에 3살짜리 남동생을 태우고 텅 빈 동네를 늦게 빠져 나가는데 볏짚 쌓아놓은 곳에서 어떤 남자가 튀어나오며 "동무들 어델 가오?" 하며 따라 붙었다. 의정부 쪽으로 고개를 넘어 뛰어가는데 형이 "아버지 저기 국군 아저씨들 와요!" 하고 소리치자 리북놈이 지게를 낚아채서 이불을 돌돌 말고 논두렁으로 굴렀다. 그때 어머니가 소리쳤다. " 저기 빨갱이가 있어요!" 도망치던 국군 2명은 보이는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다시 어머니는 "저 이불 속에 빨갱이가 있어요." 했다. 이불을 간신이 빼앗고 팡,팡, M1총을 쏘고는 달아나는 국군, 어머니가 뛰어가는 국군을 향해 또 소리쳤다. "아저씨! 저 빨갱이가 안 죽고 우리를 처다봐요." 그때 뒤돌아보니 총을 맞고 아파서 그랬을까, 고개를 쳐들고 기를 쓰며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국군은 다시 가서 빵빵 머리통을 쏘고는 뛰어 달아났다.
의정부를 십 리(4km) 남겨 두고 고주네란 동내가 있는데 그곳에 가니 피난민들이 집집마다 모여서 수근거리기를, 의정부가 이미 인민군에게 점령 당해 갈 수 없다며 그곳에서 하룻밤을 잔다고 방들를 모두 차지하고 우리는 소 오얀간에 멍석을 깔고 누었는데 쇠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밤 중에 도깨비 불같은 후레시를 자는 사람 얼굴에 비추며 일어나라는 이북 말투가 들려 우리는 자다 일어나서 마당으로 끌려 갔고 이미 그 집 마당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다.
"동무들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보이게 하시오." 인민군의 지시에 우리는 모두 손을 내밀고 서 있는데 저쪽에서 스님 복장을 한 젊은 남자 두 명이 끌려 나오는데 내 눈에는 낮에 빨갱이를 쏘아 죽인 국군아저씨였다. 손을 보면 농군들은 일을 많이 하여 군살이 박혔고 일 하지 않은 사람들을 추려 내어 10여 명을 새끼줄로 몸통과 손을 뒤로 해서 굴비 엮듯 묶어서 데리고 갔다. 세 살짜리 동생은 어떻게 많이 울었는지 크잇 크익 숨을 들이 마시며 어머님의 달래는 목소리에 어머니 품에서 잠이 들었다. 고주네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다 보니 어제 우리를 따라 오다 죽은 리북사람이 논뚝 밑에 쪼그리고 있어 무서워서 뛰어 들어왔다.
우리집에는 인민군 본부가 차려져 있었고 바지에 빨간줄을 두 줄 친 장교는 "동무들이 이 집 주인네요?" 하며 웃는다.
"안방은 내가 쓸테니 동무들은 다른 방을 쓰시오." 하는 말에 꼼짝 없이 내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지내는데 낮에는 꼼짝 않고 자다가 밤이면 장교는 말을 타고 쫄병들은 걸어서 어데로 갔다.
공산당 세포위원장을 뽑는다며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으더니 성분 분석을 하는데 하나하나 불러서 남반부에서 하는 일과 친인척 중에 국군이나 경찰, 선생님이 없나 물었고, 동선이 아버지라는 일자무식 그 동네에서 제일 못 사는 사람에게 "동무가 우리 인민 공화국을 위해서 세포위원장을 맡으시오" 하며 빨간 완장을 팔에 채워 주었다.
그리고는 조직위원장이란 어마어마한 직급을 우리 아버지에게 주고 동네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명했다. 그리고는 인민군위원회를 한다며 동선이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를 불러 동네사람들에게 물어 본 내용을 답한 내용과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워낙 선비처럼 착한 분이라 아무 말씀이 없었으나 동선 아버지는 그간 살면서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몇 명 들먹이자 옆에 서 있던 인민군에게 "빨리 가서 이놈들을 잡아 오라우!" 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내 동창의 아버지와 동네에서 조상 대대로 잘사는 김00 할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서울에서 공무원을 한다는 정00 씨 세 사람이 잡혀 왔다.
그러고는 세포위원장에게 들은 대로 다그쳐 물으며 조금 전 거짓 자백을 한 죄를 인민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며 저녁 때 동네 사람들을 학교 마당으로 모이게 하라고 조직 위원장인 우리 아버지에게 지시했고 아버지는 동네를 돌며 해가 지기 직전까지 운동장에서 인민재판이 열린다고 모두 모이라고 전했다.
저녁 때 모두 모인 동네 사람 앞에서 직결 재판식 인민재판이 이루어졌고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면서 인민군이 "반동분자를 처벌을 원합니까?" 말하니 "예 " 하고 대답했다.
동네 사람들이 겨울에 어려울 때 쌀을 꾸어 주어 굶어 죽지 않게 했던 부자 할아버지, 아들이 서울에서 공무원이라며 거들먹거리고 다니던 정00 씨, 우리 동창의 아버지는 싸움을 잘하고 힘이 세서 주먹 자랑을 했다는 죄로 뒷골이라는 곳으로 끌려가 나무에 눈을 가리고 묶은 채 동네사람들이 몽둥이, 돌 닥치는 대로 때려서 죽이고 말았다. 참으로 무서운 일을 보고 만 나는 속으로 인민군이 되어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등교를 하니 피난 안 나간 친구들만 모였고 담임선생님인 홍영자 선생님(우리 어머니의 사촌 오빠 딸이니 나에게는 외 4촌 누나였고 공산당이 일제시대 때 주민들이 살기위해 원산에서부터 조직한 국내파 공산당과 쏘련에서 내려온 김일성파 공산당으로 갈라져 있는데 홍선생은 아버지가 원산에서 세탁소를 하며 공산당 조직에 총수를 맡아 박헌영의 지시를 받는 관계로 공산당 학교 선생님으로 혼자 남아 있었다)이 나와 계셨다. 학교 교실 정면에는 김일성 장군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밑에 인민공화국 국기(인공기)가 걸려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는 자유를 찾았으며 김일성 장군이 서울까지 점령하여 곧 통일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인민 공화국 국가를 풍금으로 치면서 가르쳐 주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하며 목청 높여 함께 노래를 배웠고 소년단을 조직한다며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이게 하고는 단상에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뛰어 나가니 단상으로 올라 오라고 하고는 나를 인민 소년단 단장으로 임명하는 게 아닌가!!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가빴다. "나도 인민군이 되기 위해서는 소년 단장을 잘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선생님이 적어 준 쪽지대로 오른손을 들고 우리 동무들의 맹세를 힘차게 낭독했다. 선생님은 내 오른손 위에 빨간색의 완장을 끼워 주었고 목에도 빨간 머풀러를 매 주셨다. 나는 인민 공화국의 간성으로 태어나기 위한 첫발을 힘있게 밟고 일어섰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2편
[엇갈린 사상에 피맺힌 홍선생님]
먼저 기술했듯이 홍영자 선생님은 나의 외사촌 누님이며 그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원산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토속 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한 공으로 해방이 되자 적산가옥(일본인들이 살다 두고 본국으로 도망가거나 죽고 없어서 빈집만 남은 가옥을 말함)을, 그 당시는 공산당이고 민주주의고 이념 갈등이 없던 시절에 공산당에서 서울의 을지로 5가 방산시장의 3층 집을 접수하여 홍선생님의 가족에게 주었다. 그곳에서 공산당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았으나 남쪽에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38도선 이북에는 김일성이 정권을 세워 공산당 소탕 작전이 벌어지자 홍선생의 아버지는 붙들려 가서 조사를 받고 남쪽으로 전향을 하면서 공산당 조직을 고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나기 전에 홍선생 아버지와 몇 명의 남자들이 우리집에 내려와서 점심 식사를 하고 삽을 가지고 우리아버지 보고 따라 오라고 하여 어린 나도 무슨 일을 하는지 따라 갔다.
우리집 뒷산을 넘어 가니 뽕나무를 줄지어 심은 밭이 있었는데 그 뽕나무 밭에 한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그 곳을 파라는 것이었다. 뽕나무 뿌리가 자라 파기 힘든 곳 을 파니 그 곳에서 항아리가 뚜껑이 닫힌 채 나왔고 항아리 속에는 무슨 종이로 된 문서가 있었는데 공산당 조직표와 지령 문서 등 홍선생 아버지의 활동 문서였다. 그 문서에 적힌 대로 동네에서 함께 참여한 공산당 조직이 모두 잡혀 가서 죽었고 홍선생 아버지는 떳떳하게 풀려나서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한국 전쟁이 일어나니 한강 다리도 끊겨 버리고 도망을 못 가고 공산당에게 잡혀서 홍선생 부모는 둘 다 처형당했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몇 날을 울 아버지와 홍선생이 함께 서울에 올라갔으나 공산당 본부 정문에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 내려 오며 홀로 되신 큰 할머니와 나와 나이가 동갑인 칠성이만 데리고 내려 오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공산당을 배신한 죄로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공산당에게 처형당하고 홍선생님은 남아서 적극적으로 김일성 장군의 사상을 따라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UN군이 참전하여 9. 28. 서울 수복이 되고 공산당이 물러가면서 정00씨라고, 공산당에게 인민재판을 받고 동네 사람들에게 매 맞아 죽은 사람의 아들 정지원(서울에서 공무원하던)이란 분이 내려와서 대한 청년단을 조직하고 학교 마당에서 매일 청년들을 집합시켜 나무로 깎아 만든 총같이 생긴 것을 어깨에 올려 메고 훈련을 하곤 했다.
새벽에 자는데 갑자기 우리집 담 밖에서 소총 소리가 따, 따, 땅, 콩 볶듯 나더니 대한 청년단 단장 정지원이가 청년들을 데리고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모두 밖에 나가 마당에 일렬로 서라는 명령이다. 우리 어머니는 아바지 옆구리를 찌르며 귓속말로 당신이 공산당 앞잡이 조직 뭔가를 해서 우리 아기들까지 다 죽게 생겼다며 온 식구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빨갱이 선생 이집 조카딸 어데다 숨겼어!!" 하며 홍선생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때야 한숨을 놓고 있는데 아궁이 속 굴뚝 밑에까지 다 뒤져도 안 나오니 그냥 갔다.
그 뒤에 홍선생은 잡혀서 대한 청년단의 재판을 받았는데 사실은 홍선생이 이뻐서 사랑했던 정지원이가 그를 자기가 죽인다며 데리고 가서 회암 고개에서 거시기만 하고 내빼게 하여 아직도 살아 계신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3편
<공중에서 떨어지는 드럼통>
UN 군이 참전하자 하늘에서는 처음 보는 독수리 같이 생긴 정찰기가 앵~~~앵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면서 먹이를 찾아 날듯이 정찰을 하고 주민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하얀 앞치마를 벗어서 흔들어 대고 인민군이나 우리 소년단은 모두 학교 교실이나 방공호를 파놓고 그 속으로 숨어들었지요.
그 이상한 비행기가 돌고 가면 커다란 새같이 생긴 비행기가 와서는 드럼통을 똥 싸듯이 하늘에서 떨어뜨리는데 땅에 떨어지면 쾅~ 하고 터지면서 그 주위가 모두 불바다가 되곤 합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비행기가 가고 난 다음에는 주민들은 불을 끄고 다친 사람이 없나 살피는데 우리 학교 같은 반인 정상복이란 놈이 드럼통 폭격에 맞아 시꺼멓게 탄 모습에 아직도 살아서 눈이 빨갛게 돼서 손의 팔뚝이 살이 찢겨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어그적 거리며 소리치고 울었다. 상복 엄마에게 달려가서 알리고 다시 갔을 때는 이미 상복이는 길바닥에 쓰러져 죽은 시체에서 연기인지 김인지 모락모락 올라오고 개 끄슬리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인민군은 하나도 못 죽이고 주민들이나 주민이 사는 집만 태우고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전쟁이었다. 이렇게 폭격이 심해지자 동네 사람들은 다시 피난 보따리를 싸서 남부여대하여 이번에는 회암사(고려조 때 동양에서 제일 큰 절로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이곳으로 와서 일생을 마친 곳이고 그 태조 이성계를 보살피며 지금의 비서실장을 한 우리 할아버지에게 증(贈) 도승지라는 벼슬과 그 곳의 밭,논, 산을 주어 우리 친할아버지가 화순(지금의 광주)에서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혁명 농민혁명운동에 가담했다가 전봉준이 잡혀 처형당하자 이곳으로 호패를 관가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가지고 도망 와서 몰래 숨어서 살게 된 곳이다) 뒤의 큰 산이 칠봉산이라고 있는데 그 곳에 큰 바위 밑에 동굴이 있어 그 속에 숨어 살려고 함께 떠났다.
동굴 밑에 올라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꽉 차 있어 그 곳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가 다른 바위 밑을 파고 우리 가족만 겨우 들어가 꼬부리고 잘 수 있도록 나무를 꺾어다 깔고 하루 저녁 자고나니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나물, 더덕, 도라지 등을 캐다 불을 피우고 삶아 놓으셔서 나물로 대충 배를 채우고 있는데 아버지가 우리를 불러 구경하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는 곳을 보니 동두천 쪽으로 보이는 곳에 B29(나중에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 무서운 비행기라는 것을 알았음) 비행기가 까만 똥 같은 것을 줄줄이 싸면 그 밑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재미있다고 구경을 하곤 했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4편
<인민 공화국 속에서의 생활>
회암사 뒷산 바위 밑에서의 피난살이가 며칠 되니 먹을거리도 없어 죽겠고 밭에 심은 감자며 고구마, 옥수수 논에 심어 놓은 벼에 논도 매어주어야 하고 낙동강 전투에 UN군은 정신을 빼앗겼는지 폭격이 뜸해지자 집으로 하나 둘씩 내려가고 우리도 짐을 싸서 내려 왔다.
인민군들도 모두 남쪽으로 내려가고 우리가 사는 곳에는 그럴싸하게 인민공화국이 자리를 잡고 주민들을 매일 모아 놓고는 여자들은 여성 동맹 위원회, 남자들은 세포 위원회, 아이들은 청소년 위원회라고 하여 집의 식구들이 제각기 그 위원회에 참여하여 공산주의 학습과 주민들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쌍방 간에 전투가 심해지자 보급품을 현지 조달 방식으로 바꾸었는지 면의 세포위원들이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나와서 쌀, 보리, 감자, 고구마 등 인민군의 먹을거리를 할당을 지어 동네마다 얼마씩 모아 놓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갔다. 그러나 농민들은 피난 다니느라 농사를 제대로 못 지어 자기집 식구 먹을거리도 없는 처지에 내어 놓을 것이 없었고 먹거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우리집은 뒷곁에 있는 장독대 밑을 밤에 깊이 파고 그 속에 우선 먹을 것을 넣어 두고 꺼낼 때는 장독 하나를 옮기고 그 밑에 장독대 받침돌을 들어내면 퍼다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리고 남은 쌀 몇 가마니는 학교 운동장 앞에 큰 웅덩이(물을 가둬 두었다 논에 물을 퍼서 쓰도록 한 작은 연못) 속에 새끼줄로 단단히 쌀가마를 묶어서 집어 넣고는 새끼줄 끝을 웅덩이 가장자리 물 속에 말뚝을 박고 그 곳에 매어서 감춰 놓았다.
우리 동네 세포 위원장인 동선 아버지는 집집마다 다니며 먹거리를 내어 놓으라고 졸라도 내 놓는 사람이 없자 면 세포위원에게 이야기를 하여 인민군 몇 명하고 동네를 뒤지고 다니는데 길다란 나무를 어깨에 메고 따라 다니는 사람과 기둥같이 생긴 나무토막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이 우리집에도 들이닥쳐 의심이 갈 만 한 곳은 모두 쿵~ 쿵~ 땅을 기둥으로 치며 묻어 놓은 곳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우리집 장독대 밑에 감춰 둔 며칠 분의 식량은 찾지 못했고 이웃집으로 다 돌아서 물 웅덩이를 긴 막대기로 저으니 우리가 감춰둔 쌀이 발견되어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여 우마차에 모두 싣고 가 버렸다. 그 때부터 우리는 굶기를 밥 먹듯 하며 다 자라지도 않은 감자를 캐어 쪄 먹고 수수가 조금 익은 듯 싶으면 그 익은 것만 낫으로 잘라다 수수밥을 하여 먹고 겨우 죽지 못해 살아가며 논에 쌀이 빨리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면에서 나온 세포 위원이 노트에 연필까지 들고 아버지를 앞세워 논으로 나가기에 따라가 보았더니 쌀 수확량 예비 조사를 한다며 벼 한 포기에 몇 알이 달리고 포기의 벼 숫자 논에 줄를 지어 심어 놓은 벼 포기 수를 합산하여 합계를 쓰고는 그 밑에 우리 아버지 보고 서명을 하라고 한다. 아버지는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이름을 적어 주었다. 집집마다 모두 그런 식으로 식량 수탈의 멍에를 씌우는 것이었다.
벼가 조금 익으면 익은 벼 목을 잘라서 가마솥에 져서 말려서 손으로 비비면 익은 쌀이 나오는데 배 고프면 그걸 먹고 살아 가는데 음력으로 8월 7일이 서울의 왕십리에 사시는 외할머니 생신이라고 어머니는 70리(28km) 길을 걸어 할머님 댁에를 가셨는데 그때가 하필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서울을 탈환하는 작전을 개시하는 바람에 서울쪽 하늘이 뻘겋게 일어났다 지워지고 몇날 며칠을 기다려도 어머니는 오시지 않고 동네에서는 소고 돼지고 있으면 인민군에게 빼앗기니 잡아서 동네 사람끼리 나누어 먹는다고 아버지가 고기를 많이 얻어 오셨는데 큰 두레박에 고기를 넣어서 썩지 말라고 우물 속에 넣어 놓고는 저녁마다 피어오르는 서울 쪽 하늘에 불빛을 보며 4부자가, 어머니가 서울서 돌아가셨다고 소리치며 울었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5편
<70 리(28km)를 80kg 소금 가마를 이고 2일간 굶은 채 시체를 넘고 또 넘어 돌아오신 어마님>
매일 서울쪽 하늘이 훤하게 밝혀 주던 포화도 멎었는지 며칠 째 서울 쪽 하늘만 바라보며 우는 사이 우물 속에 넣어둔 어머님 오시면 드리려던 고기도 쇠가 나서 나무 가지로 구더기를 털어내곤 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는데 동네 사람들이 수수비 자루와 쓰레받기, 함지박 등을 들고 건너 마을 오리골 쪽으로 달려가기에 우리 4부자도 함께 쫓아 가 보니 마을 앞을 지나는 신작로 위에 쌀, 보리, 콩, 좁쌀, 수수 등 오곡이 흩어져 쫙 깔려 있으니 각자 먹을거리 없는 형편에 그거라도 쓸어다 밥을 해 먹는다고 쓸어 모아 담느라 정신없었다. 우리도 이게 웬 떡이냐 싶어 4부자가 모래 섞인 잡곡들을 쓸어서 함지박 두 개를 들고 들어오며 동네 분위기를 보니 인민군이 밤새 철수를 하여 도망가고 빈 동네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길바닥에 흘린 곡식은 밤에 인민군이 우마차에 농부들을 시켜 도망치며 끌고 가든 도중에 어느 농부가 짐을 가볍게 하려고 무엇으로 가마니에 구멍을 일부러 내어 줄줄 흘리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동네를 돌아보고 오시더니 동선 아버지(세포 위원장) 규언이 아버지는 형님을 인민군이 뽑아 이북으로 함께 가자고 하니까 우리 형님은 큰아들이라 이곳에서 조상을 모셔야 한다며 대신 내가 가겠다고 했는데 둘 다 데리고 인민군을 돕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갔는데 아버지는 어머니가 살아오실까 하는 생각과 남은 어린 삼형제 때문에 못가셨다며 국군이 들어오면 누가 고발을 하여 죽을 까 봐 걱정을 하셨다.
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어두워지자 잠을 자려고 조용히 누었는데 "한종아~~" 하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지 않는가!!
4부자가 벌떡 일어나 부르는 소리가 나는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어머니는 쓰러지셔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계시고 그 옆에는 커다란 쌀가마가 떨어져 있는데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갖고 가자는 표정이셨다.
아버지가 재빨리 집으로 가셔서 지게를 갖고 오셔서 지게에 지고 우리 형제는 어머님을 부축을 하여 모시고 집에 들어와 아침에 길에서 쓸어다 물에 씻고 조리로 돌을 골라 해 놓은 잡곡밥에 우물에 두었던 고기를 굽고 하여 드리니 잘 잡수시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서울에 가시고 다음날부터 서울이 쑥대밭이 되도록 포알이 날아와 모두가 불타고 도시가 부셔졌는데 왕십리 역 창고에도 폭탄이 떨어져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곳에 가서 창고에 쌓아 놓았던 것을 꺼내 오는데 어머님도 함께 가셔서 혼자 이고 외삼촌 집으로 오신 것이 80kg짜리 소금이었단다.
어른 장정도 들기 힘든 80kg를 혼자 할머니 댁까지 이고 오신 것도 힘든 일인데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을 지나 포소리가 멎자 그걸 이고 시체가 나뒹구는 길을 걸어 2일간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하고 오셨다니 믿을 수 있습니까?
전쟁이 나고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 산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최고의 에너지를 생산하여 평상 시 할 수 없는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6편
<쌕~씨~~>
어머니는 못내 걱정스러운 일이 아버지가 공산당 밑에서 일를 하여 누가 고발하여 잡혀 돌아가실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버지를 설득시켜 장독대 밑에 파 놓은 공산당 시절 곡식 감추었던 비밀 창고에 낮에는 꼼짝 않고 요강까지 들고 들어가 숨어 있으라고 하시고는 전쟁 중이라 소금이 집집마다 떨어지고 장도 서지 않아서 가을철이라 김장들도 해야 하고 소금이 금값이던 시기에 어머니는 그 힘들게 이고 오신 소금을 함지박에 퍼서 이고는 동내를 돌며 집집마다 나눠주며 혹 있을 수도 있는 신고를 못 하게 주민들의 입을 막아 놓았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판단이 어렵지만 평소에도 착한 일만 하셔서 그런지 신고하는 이가 없어 아버지는 무사하였다.
동내에서 공산당 앞잡이 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잡혀가서 즉결재판(대한청년단 역할)으로 사살되는 무서운 일들이 매일 일어나고 우리식구들은 아버지 걱정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하루는 동내 아주머니들이 채소밭에 일을 하러 나갔는데 길 옆을 지나가던 8~9 명의 미군들이 쌕씨 ~ 하며 밭으로 들어와서 무서운 생각에 동내 아줌마들이 맨발로 각자 흩어져 뛰어서 몆 분은 오셨는데 우리 이웃집에 수복 할머니는 키도 작고 연세가 많으셔서 잡히셨는지 돌아오질 못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미군들이 들어 왔는데 그놈들은 여자만 보면 쌕씨~ 하며 잡아서는 단체로 욕을 보이는 나쁜 놈들이라 여자 들이 숨어서 살고 하였다.
저녁 늦게야 앞치마에 무언가를 한 보따리 싸서 이고는 어그적 어그적 밑이 아파서 제대로 걸음도 못 걸으시며 돌아오신 수복 할머니가 안방에서 미군들이 준 거라며 풀러 놓은 것은 우리가 접해 보지 못한 이상한 물건들이였으며 냄새가 향긋하고 맛있어 보였다.
처음으로 집어든 것은 지금의 치약이었는데 그때는 치약은 우리나라에 나오지도 않았고 그 후에 가루치약이 나오고 그 옛날에는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서 이를 닦던 시절인데 수복 할아버지가 뚜껑을 열고 조금 누르니 향이 나는 것이 삐죽 나와 그것을 입에 물고는 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신기해하며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한 입씩 물고는 참 맛있다 하며 현대의 치약을 돌려가며 먹던 생각을 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7편
<미군과 중공군이 톱질하는 틈에 끼어 톱밥처럼 떨어져 간 우리 민족>
미군들은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적이 통치하던 곳을 파죽지세로 몰고 올라가며 모두가 자기 세상인 양 기가 살아 있었고 잘 처먹고 배출할 곳이 작대기 밖에 없었는지 가는 곳 마다 색씨~ 하며 민간인 집들을 뒤지고 다녔고 숨어 있다 걸리기만 하면 여러 놈이 한꺼번에 욕을 보여 여성들의 수난 시대가 왔다.
월남의 여성들은 프랑스군 점령 시 프랑스군이 하도 여성들을 욕을 보이니 무슨 나무뿌리를 씹어서 이를 까맣게 만들 어 프랑스군의 겁탈을 막아 지금도 나이든 할머니들은 이가 새까맣게 되어 흉하다. 이렇듯 국가를 잃거나 전쟁에 외국군을 참전시키면 국민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내 친구는 미군 부대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다며 매일 미군 부대에 가서 군화를 닦아 주거나 청소를 하고 돈을 벌어 오더니 전쟁 후 그 미군 장교가 미국으로 가면서 데리고 가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놓아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미국 여성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고 우리 외갓집의 큰 외숙모는 외삼촌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 가 탄광에서 일을 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고향에 돌아와서 장가를 들고 살다가 몸이 아프고 기침을 많이 해서 중국사람 떠돌이 약 장사에게 환약을 사서 먹었는데 하루 반 알씩만 먹으라는 것을 약을 먹으면 기침이 안 나고 좋아 지니 빨리 나아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알을 다 먹고는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가 그 곳에서 피를 토하고 작고하신 큰 외삼촌의 외숙모가 지금 같으면 미쓰 코리아 같이 이뻤는데 양놈들한테 당하고는 아예 양갈보로 들어가 돈을 많이 벌어 논밭을 사 주고 했다.
미군들은 쫓겨 가는 인민군을 쫓아 총 한 방 안 쏘고 평양을 점령하고 길주, 청진, 혜산진까지 곧 통일이 될 것처럼 거의 다 조국을 찾았는데 국경 근처에는 중공군이 몰려와서 추운 겨울에 강물이 얼기만 기다리고 있을 때 맥아더 사령관이 본국에 건의하기를 중국에 원자폭탄 하나만 쓰면 중국의 참전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나 그렇게 되면 소련이 참전을 할 것이고 2차 세계대전에 몸살을 앓던 미국의 수뇌부가 허락을 안 해서 급기야 중공군이 국경을 건너 참전을 하여 인해전술로 피리를 불며 미군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공격을 하니 급히 아주 추운 겨울에 미군은 퇴진을 하여 "국제시장" 영화처럼 1,4 후퇴 때 이북에서 피난민 배를 타려고 발버둥 치는 일이 벌어졌고 우리는 중공군이 닥치기 전에는 국군들이 중공군이 들어오면 식인종이라 빨가벗겨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개 꺼슬리듯 사람을 구워 먹는다며 빨리 피난을 가라고 채찍하였으나 고향을 떠날 수 없어 그냥 버티기로 결정했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8편
<아~!! 아름다운 내 조국 산하여~!!>
내가 어려서 자라든 고향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건강식품의 생산 보고였다.
이른 봄이면 얼게미 체를 들고 각 웅덩이를 돌아다니며 웅뎅이 가에 물풀 속에 얼게미를 가만히 넣었다 살짝 들어내면 지금은 토우라 하는데 그때는 민물 새우가 팔딱 팔딱 뛰면서 한 움쿰씩 나오고 거기에는 방게와 송사리 쇠미꾸리(작고 등에 두 줄의 황색 선이 그어진 미꾸라지) 등이 올라와 한 시간만 잡으면 회롯불에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뚝배기에 씻어서 넣고 어머니가 양념을 넣으시고 끓이면 그 맛이 꿀맛이었고 여름철에 소낙비가 내리면 집 안마당에 빗줄기를 따라 올라 왔다 떨어지는 큰 미꾸라지를 손으로 잡으러 뛰어 다녔고 비가 그치면 뒷동산을 한 바퀴 종댕이를 들고 돌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청송이 버섯(그 당시는 덜 퍼진 일급 송이버섯을 옹아리 버섯이라 했고 잎이 퍼진 것은 청기왓집 같다고 청기와 버섯이라고 부름), 샛노란 꾀꼬리 버섯, 밀 버섯, 절구통 같이 생겼다고 절구통 버섯, 참나무에 나는 참버섯, 목이버섯 등 수 많은 버섯들이 나를 기다려 한 종댕이를 따다가 찌게에 넣으면 그 맛이 지금도 침을 삼키게 한다.
뒷동산에 올라 잘 자란 소나무를 꺾어 낫으로 겉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씹으면 그 사이에서 살탕보다 더 단 송기 맛이 좋았고 늦여름이면 계곡에 지천인 머루와 다래를 따다가 두엄 속에 넣었다 3일 후에 꺼내 먹으면 그 달콤한 향기가 지금은 찾을 길 없고 겨울철에는 밤이면 통발로 지붕 밑에 잠든 참새를 깨워 잡아다 구어 먹고 따뜻하고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철엔 안마당에 소코리 덫을 놓고 소코리 위에는 맷돌을 얹고 밑에다 약간의 좁쌀을 뿌려 놓고 안방에 숨어서 유리창으로 눈만 내 놓고 내다보면 참새 떼가 날라 들어 한참 신나게 먹을 때 덫 끈을 잡아채면 10여 마리는 쉽게 잡아 구어 먹으면 그 맛 또한 참새고기 맛이란 말이 나올 정도니 오죽 하였겠는가?
내가 이른 초저녁에 잠들면 아버지가 깨우셔서 일어나면 안마당에 숯불을 피우시고 낮에 웅뎅이에 물을 퍼서 논에 대시다 잡은 팔뚝만한 민물 장어를 지글지글 구워 놓으시고 그것을 먹으라고 깨우셨고 앞 냇가의 호수에는 청둥오리 떼가 겨울이면 몰려들어 콩알을 가운데만 조금 파고 그 속에 '싸이나'라는 약을 넣고 밥풀로 그 위를 때워서 굵은 실에다 꿰어서 길게 호수 위에 늘어놓고 아침에 나가 보면 큰 청둥오리가 몇 마리씩 잡혀 그놈에다 무를 납작 납작하게 썰어 넣고 볶아 놓으면 그 맛 또한 잊을 손가? 사시사철 웰빙 식품만 어려서 먹고 자라 내가 이렇게 건강하지 않나 생각한다. 밝은 달이 뜨면 늑대 울음소리가 애기 울음소리 처럼 산 모퉁이 칠겸네 산소에서 들려 처량하게 들려 왔고 지금은 없어진 어여쁜 물총새가 우리집 뒷산의 계곡에 깊은 굴을 파고 집을 짓고 새끼를 낳아 물고기들을 열심히 물어다 날랐고 나는 그 물총새를 따라 뛰어 다녔다.
이 아름다운 강산에 전쟁이 나서 어린 소년은 꿈을 잃고 대포소리와 비행기 폭격 소리에 귀가 아팠고 항상 생과 사의 갈림길을 뛰어 다니며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10편
<얼음이 언 한강을 걸어서 두 번째 남으로 피난 나가는 서울시민과 군인들>
드디어 몇 날 며칠을 쌍방 간에 전투 속에 미군들이 다시 전선을 서울 이남으로 옮겼는지 포성은 멎고 비행기 폭격만 심해졌다.
6,25 사변동이(1950년생) 내 막내 동생은 어려서 전쟁의 포화 속에 끌려 다니다 죽을 병이 걸렸는지 계속 울어 제끼는데 인민군 통역관이 방공호 앞을 지나다가 들어와서 애가 울어 적에게 들키면 식구가 다 죽는다며 "저 멀리 논바닥에 팽개치라우." 하고 우리 어머님을 독촉한다.
할 수 없이 어머니는 얇은 포대기에 싼 갓난 애기 태종이를 데리고 나가 정말 그 추운 겨울에 애를 버리고 들어 오셨다. 형님과 나는 울면서 동생을 찾아 나섰고 애기 울음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세우고 찾아 다녔다. 한 동안 드넓은 들판을 찾아다니는데 모기소리 같이 가끔 애기 우는 소리가 들려 그 곳으로 뛰어가 보니 들판의 눈 위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조금씩 가끔 울고 있는 것이었다. 팔 다리를 하늘을 향해 들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울던 모습이 안타까워 지금도 눈물방울이 앞을 가려 글을 쓸 수가 없다. 형이 동생을 다시 안고 방공호로 들어섰더니 어머니가 이번에는 대성통곡을 하며 우리 식구 모두가 잘못 태어난 태종이를 안타까워하며 울었다. 한없이 울다 지쳐 쓰러졌다. 태종이가 어머니 젖을 먹는데 뒤통수를 보니 머리가 하나도 없이 부서져서 맨살만 보였다. 추위에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울다가 머리가 부서져 빠진 것이었다. 그렇게 울며 고생만 하던 사변동이 태종이는 아침을 방공호에서 먹는데 울음소리도 숨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춥고 고통스러운 포격 속에 시간은 흘러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이른 봄이라 생각 되는데 다시 포탄이 날아들고 밤이면 나팔 소리와 함께 중공군들이 산에서 몰려 내려와 미군을 포위하고 격전이 며칠 벌어지더니 중공군은 사라지고 미군들이 다시 찾아 왔다. 중공군 치하에서 포탄과 대포 그리고 중공군의 찢어지는 듯한 나팔소리에 질린 우리는 "이때다!" 하고 남쪽으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나가며 보니 마을마다 산천마다 우리 강산은 불타고 부서져 빨가벗은 애기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리는 몇 날 며칠을 걸어 폐허가 된 서울을 지나 동막나루(지금의 워커힐 윗쪽 같다)에 도착하여 쌀을 주고 조그만 나룻배를 빌려 한강을 건너 계속 남으로 걸어가야 했다. 하루는 늦은 아침에 어머니가 바가지에 반찬과 잡곡밥이 가득 섞인 밥을 내어 놓으시며 이것으로 배를 채우라 하신다. 봄비가 와서 땔나무를 구할 수 없고 밥할 곳도 없어 큰 동네를 돌아 다니시며 동냥을 해 오신 밥이었다. 온 식구가 배고픈 판에 허겁지겁 그 밥을 비벼 먹고는 다시 짐을 지고 이고 길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며칠을 걸려서 왔는지는 기억 할 수 없으나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의 6촌 형님 댁에 도착한 것이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11편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 6촌 형님 집으로 피난을 갔으나>
이곳 안성에는 화순 최씨 집성촌이 형성돼 있는데 그 사유는 1592년 4월에 일본놈들이 쳐 들어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592년 5월 4일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0여 척의 일본 해적을 무찔러 승리할 당시 우리 집안의 선조이신 잠 자 할아버지가 이순신 장군의 해선의 선장으로 활약을 하셨고 1598년 명나라의 해군과 합쳐 200여 척의 배로 500여 척의 일본 해적을 물리치고 이순신 장군이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치열한 해전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지휘관으로 있는 배는 적의 포탄을 맞아 물속에 수장되니 할아버지의 시신도 함께 수장되고 찾지 못했다.
그 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일본군을 무찌른 공을 치하하기 위해 참전 용사들에게 포상을 하였는데 지금의 무공 훈장 과 같이 서열이 있었고 이순신 장군은 충무공(최고 높은 무공)에 봉하시고 우리 할아버지는 그 바로 밑에 등급인 충절공으로 봉하시고 안성에 경부 고속도로 우측에 산과 밭, 논, 70만 평을 하사하시여 지금의 우리 종산으로 쓰고 있고 종산 입구에는 누각을 짓고 임금이 내리신 충절공 패를 걸어 놓고 매년 3월 1일이면 제를 올린다.
그 후 그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퍼져 집성촌이 되었고 종종 땅에 농사를 지어 잘들 살고 있으니 아버지 생각에는 그 곳에 가서 농사를 종종 땅에 지으며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사시려고 가족을 이끌고 찾아 갔으나 문전 박대를 하며 자기 집에서는 잘 곳도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는 6촌형 놈의 내외간의 문전 박대를 받고 날은 어둡고 갈 곳이 없어 먼 친척 집에 가서 사정을 하고 사랑방에서 하루 저녁을 자는데 몸이 가렵고 따가 와서 성냥불을 켜고 보니 빈대가 벽이고 우리 식구들의 몸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밖으로 뛰쳐나와 옷과 이불을 털고 빈대 잡느라 밤을 새웠다. 12촌인가 되는 먼 친척이었지만 그들은 인심이 후해 아침밥도 주면서 사랑채에서 살라고 하는데 빈대가 많아 살 수 없어 다시 보따리를 싸 갖고 만세고개를 넘어 용인 쪽으로 피난을 가는데 힘도 들고 눈물이 나서 제대로 걸어 갈 수가 없었다.
하루를 꼬박 걸어 깜깜한 밤에 도착한 곳은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우연치 않게 구성면장님 마당가에 있는 연자 방아간이었고 그 곳에서 하루 저녁을 쉬고 갈려고 주인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허락을 받으러 가셨는데 안채에서 잘 생긴 중년 노인이 나와서 어데서 왔으며 성씨는 어떻게 되는지를 묻는 과정에 어머님이 남양 홍씨라 하니까 "우리 외가댁 손님이라" 며 사랑채를 내주고 하인을 시켜 밥상을 뻑쩍찌근하게 차려 내왔다.
그리고는 술을 들고 들어 와서 아버지에게 권하며 자기 소개를 하는데 구성면 면장직을 갖고 있고 윤 자, 달 자, 섭 자 라고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외가댁도 다 없어져서 남양 홍씨만 보면 외가집 같다며 그 곳에서 땅도 주고 집 지을 땅도 줄 터이니 이곳에서 살라고 권하셨다. 우리 식구는 윤 면장님의 특별한 배려로 우물가 남향으로 집터를 주어 집 지을 나무를 형과 아버지가 하러 다니고 나는 나무지게를 지고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해 와야 했다.
한 달은 걸려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있는 조그만 집을 짓고 벽에 외엮는 나무는 개옷나무 쪽쪽 뻗은 것을 잘라다 가로 세로로 묶고 거기에다 진흙을 이겨서 바르고 구들도 놓고 불를 피워 빨리 마르기만 기다리며 면장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살았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12편
<피난살이 눈물 살이>
집을 우리 아버지가 잘 지시고 해서 방바닥이 마르자마자 이사를 하여 새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기분은 하늘을 얻은 듯 기뻤다. 그런데 겨드랑이부터 사타구니까지 가렵기 시작을 하더니 꼬추까지 퉁퉁 부어 오줌을 못 누을 만큼 가렵고 얼굴도 퉁퉁 부었다. 우리 식구 중에는 나만 그랬다. 어머니가 소 오줌을 받아다 그 물에 세수를 시키고 온 몸 목욕을 시키곤 하였다. 민간요법은 다 해 보았는데 소금을 손바닥으로 바르기도 하고 빗자루로 쓸기도 하고 별 짓을 다 해 보았다. 알고 보니 벽을 엮어놓은 옻나무가 불을 때서 집을 말리느라 옻김이 방에 꽉 차서 옻에 옮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 형을 따라서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 와야 했다. 10살(만9세) 나이에 부피가 큰 나무 지게를 지고 끙끙거리며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모습을 나무꾼들이 보면 "아유~어린애가 쪽제비 닭 잡아가듯 나무 지게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다." 며 혀를 차고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이 해 오는 나무는 구루마에 싣고 30리 길을 끌고 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 팔러 수원시의 팔달시장의 개천가 나무시장에 구루마를 쭉 세워 놓고 기다리면 손님이 와서 흥정을 하고 서로 값이 맞으면 그 집까지 끌고 가서 나무를 모두 내려 쌓아 달라는 곳에 놓고는 하루 먹을 만큼의 돈을 받아 식량을 사고 찬거리를 사고 신갈리를 거쳐 30리 길을 부지런히 걸어서 다시 집에 오셔야 했으니 집에 땔나무는 내가 해 와야 하는 막중한 일을 안 한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버지는 오전 중에 큰 구루마 빈 것을 끌고 오시면서 그 위에 곡식과 찬거리를 싣고 힘이 많이 드시는지 축 늘어진 몸으로 오시면 또 나무를 하여 용인 에서 수원까지 나무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았다.
하루는 삼 부자가 나무를 먼 산에서 해 가지고 지고 오다 쉬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서 쉬시다가 갑자기 논틀 위로 달려가신다. 우리는 왜 그러시나 생각하고 나만 따라 뛰어 갔더니 논일을 하는 사람들 점심을 내와서 일꾼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곳으로 가셨다. "아이고, 여러분! 우리 새끼가 밥을 못 먹고 나무를 해 오다 죽게 생겼으니 밥 동냥 좀 주십시오." 하며 생면부지의 일꾼들 에게 밭뚝에 넙적 엎드려 절을 하니 일꾼이 한 수저씩 밥을 덜어 주어 그 밥은 주먹밥을 만드시고 자기는 물 한 그릇을 달라 하여 물을 한 대접 따라 주니 그 물에다 간장을 부어 꿀꺽꿀꺽 삼키시고 얻은 밥을 주먹밥처럼 한 덩이 손에 들고 오시여 우리 형제에게 내밀어 주시며 "배가 많이들 고프지?" 하시며 눈물이 핑 ~도셨다. 철 없는 형제는 아버지가 시장한 생각도 못하고 그걸 한 입씩 먹어 치웠다.
그렇게 살다보니 같은 한 동네에 피난 와서 사는, 아버지가 새우젓 장사를 하는 서동만이란 친구를 알게 되었고 하루는 오전 나무를 해갖고 오면서 나무가 할 만한 곳을 보아 두고 그 친구와 둘이서 그 보아 둔 산으로 오후에 나무를 또 하러 달려갔다. 둘이는 낫으로 풀을 후려 깎고 이야기를 나누며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풀을 다 베어 놓고 나니 높은 산에 골짜기에는 어둠이 빨리 와서 깜깜한 곳에서 둘이 갈퀴로 나무를 긁어 한 짐씩 해서 졌는데 길을 몰라 내려오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헤매다 지쳐서 둘이 꼭 껴안고 울다 추운 잠이 들었다.
추워서 눈을 뜨니 새벽이 밝아 오고 있어 동만이 보고 가자고 하여 나무는 다 버린 지 오래고 빈 지게만 지고 길을 찾아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데 두 어머님이 우시며 호랑이나 늑대에게 둘다 잡혀 죽었다고 하시며 엎드려 울고 계셨다. "어머니!" 하고 소리치며 엄마 품에 안기어 무서웠던 어젯밤의 한을 펑펑 토해냈다. <계속>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13편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하며>
집도 있고 아버지가 열심히 나무장사를 하여 수원 팔달시장 개천가 뚝에 어머님은 길거리 국수집을 차리시고 하여 안정된 생활 를 하니 아버지가 하루는 나를 불러 하시는 말씀이 "너도 학교를 다녀야 할 터인데" 하시며 "낮에는 집에 땔나무나 하고 밤에 학교에서 피난민들을 위한 공부를 시킨다니 거기를 가 보렴." 하신다.
그 말씀에 신바람이 난 나는 10리(4km)쯤 떨어진 구성초등학교에 달려가서 접수를 하고 낮에는 열심히 나무를 해서 집에 져다 놓고 어머니가 해서 이불 속에 넣어 놓으신 밥을 물 말아서 급히 먹고는 책보를 어깨에 둘러매고는 학교로 뛰어 갔다. 아주 예쁜 여자선생님이 오후 늦게 교실에 들어 오셔서 인사를 하고 피난민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학생들이 커다란 총각에서 부터 쪼꼬만 꼬마까지 교실이 꽉 찰 정도로 많았는데 미군들이 학교 운동장에 자가 발전기 트럭 을 대고 윙~윙 소리를 내며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다. 나는 학구열이 빛났던지 큰애들이 싫어서였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선생님 맨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선생님이 일러 주시는 대로 열심이 배웠다.
하루는 태극기에 대해 다 외어 오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그 문장을 외우기 위해 나무 갈 때도 책을 보고 외우고 나무를 하면서도 외우다 막히면 다시 책을 보며 외우고 하여 딸딸 다 외워 갖고 학교에를 갔더니 선생님이 "태극기를 외워 온 사람 손 드세요." 하여 손을 번쩍 들었더니 교실에 꽉 찬 학생들 중에 손 든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외운 대로 낭낭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외었더니 모두 박수를 쳐 주었다. 이렇게 공부 맛이 들어 열심히 일과 공부를 하니 시험을 치면 모두 100점이였다.
하루는 하굣길 깜깜한 밤 중에 운동장을 빠져 나오는데 총각처럼 큰애들이 꼬마들인 우리를 불러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너희들 공책 연필 내놔 봐." 해서 책보를 풀고 내어 놓으니 공책은 마분지로 만든 얇은 것에다 연필은 납으로 길게 만든 것에 침을 발라 써야 글씨가 써지는 것이었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14편
<도둑이 되어가는 내 모습에 학교를 그만 두고>
"이것 봐라. 이런 걸로 공부를 할 수 있냐?" 하며 학교 앞에 문방구가 있는데 그 곳에 가면 질 좋고 쓰기 좋은 것이 많으니 그것을 훔치자는 제의였다. 나는 쭈삣거렸으나 모두 다 가기에 따라 서 저쪽 끝에 사람이 오나 망을 보고 큰 총각이 작은 애를 무등을 세워 위에 창문을 열고 들어가 앞문을 열고 모든 학생들이 뛰어 들어 제각기 깜깜한 곳에서 잡히는 대로 집어 들고 뛰어 왔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주인이 금방이라도 찾아 와서 끌려갈 것 같은 죄책감에 잠을 못 자고 그 다음 날도 학교를 못 갔다. 며칠을 학교에를 안 가고 잡으러 올까 봐 걱정을 하는데 면장님이 나를 찾으신다며 면장님 댁으로 오라고 머슴을 보내셨다. 죄진 사람이 끌려가듯 가슴을 조아리며 갔더니 우리 어여쁜 여자 선생님이 웃으시며 내 이름을 부르고 안아 주셨다. 어리둥절하여 화끈거리는 얼굴 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면장님이 " 네가 공부를 잘하는데 요즘 학교를 안 나와서 선생님이 오셨으니 열심히 학교를 다니며 배워라."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양심을 속이고 그 다음 날 학교에를 가는데 그 문방구 앞을 지나갈 용기가 없어서 논틀길로 돌아서 학교에 갔더니 그놈들이 너 왜 학교에 안 나왔느냐며 야단들이다. 그렇게 또 학교에를 다니는데 그 도둑놈들이 또 이번에는 구멍가게를 털자며 떼거지를 지어 가기에 다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어 도망와서 학교에를 아예 안 다니고 말았다. 부모님이 물어 보시면 그냥 가기 싫다고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안 나가기를 잘했다. 계속 나갔으면 도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15편
<어린이 장사꾼이 되어>
학교를 안 나가니 오후에는 할 일이 없어서 애들하고 군인 놀이나 하며 지내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팔다 남은 만두와 빵을 한 보따리 주시며 친구들과 나눠 먹어라 하시고 수원시장에를 나가신다.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파시다 남은 것이라 그것을 친구들에게 나눠 주기는 너무 많고 아까운 생각이 들어 서동만이라는 친구하고 용인시장에를 나가 팔아 보려고 용인에를 갔더니 시장 안에는 사람들이 많고 모두 자리가 있어 어린 나는 어데서 팔 수가 없었다. 버스 종점인지? 버스들이 한참 서서 손님을 태우는 곳을 찾아가 버스에 올라 손님들에게 만두와 빵을 내미니 어느 아줌마가 사 주셔서 용기를 내어 버스마다 올라 2시간에 다 팔아 치우고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 왔다. 어머니에게 저녁에 이야기를 하고 내일은 물건을 더 많이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니 밤을 새워 어머니가 빵과 만두를 만들어 과일 빡스에 담아 주셨다.
새끼(새꾸라미: 볏짚으로 꽈서 만든 끈)로 어깨에 걸어 앞에 들 수 있도록 아버지가 해 주시어 아침을 먹고 용인으로 나가 버스에서 돌아다니며 빵과 만두를 파는 소년이 되었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16편
<피난살이 2년을 정리하고 고향에 들어와 보니>
어머님께서 이제는 전쟁이 동두천 연천 쪽에서 철원까지만 톱질하듯 밀고 밀리고 하지 우리 고향에는 안전하다는 정보를 얻으시고 고향에를 다녀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새로 크게 고생하여 지은 집에는 옛날에 우리 종으로 있던 사람이 들어 살고 있고 집 관리가 안 되어 엉망이라 하시며 2년 동안 고생 속에 정든 피난살이를 접고 고향으로 모두 내려 왔다.
고향이라고 와 보니 풀 한포기 없이 된 민둥산에 미군들만 꽉 차 있고 학교는 폭격을 맞아 사라지고 미군들이 가져다 준 큰 군용 텐트 안에서 공부를 하는데 선생님들도 이북에서 내려 온 선생님들이라 이북 사투리로 가르치는데 배우기가 힘들었다. 5학년에 편입되어 반에 들어가니 다 큰 처녀에서부터 큰 총각까지 전쟁 통에 학교를 못 다닌 학생들이 뒤범벅이 되어 분단 학습을 한다고 군대식으로 9명씩 분단을 짜서 나이 많은 애를 분단장으로 뽑아 뜨거운 텐트를 벗어나 뒷동산 갈나무가 있으면 그 응달에서 공부라고 하는데 선생님이 없다 보니 놀고 싸우고 하다 끝나곤 했다.
학교 운동장 한편에는 전쟁하다 버린 포알 껍데기와 총알 껍데기 그리고는 이름도 알 수 없는 군용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곳에서 반짝거리는 노란 것을 주워 장난감이 없으니 그것으로 다마치기를 한다며 서로 맞추기를 하다가 폭발하여 두 놈이 팔 다리에 커다란 부상을 당했는데 뇌관을 주워서 놀다 그렇게 되었다고 선생님이 그 군용 쓰레기 곁에는 가지 말라는 지시도 있었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17편
<전쟁으로 부서진 쓰레기를 딛고 일어서려는 민족의 몸부림>
학교라고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매일같이 운동장에 전쟁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나 나무심기를 하였다. 미루나무를 기둥처럼 3m쯤 길이로 잘라 운동장 옆에 구덩이를 파고 세워 심었고 아직 살아 있는 동네의 향나무나 개나리 나무 등을 캐어다 화단에 심는 등 학교에 가면 일을 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방공사라고 하여 포탄에 민둥산이 된 산에 돌을 쌓고 아카시아 나무나 이께다송 나무를 심고 저녁 때 내려오면 밀가루 표를 한 장씩 주어 그걸 갖고 가면 밀가루 한 되씩을 주어 그걸로 수제비국을 끓여 먹으며 연명해가는 생활이었다.
하루는 사방공사를 나갔던 승호 아버지가 지뢰를 밟아 즉사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뒷자락은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시절에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집고 살아남아 이렇게 색 푸른 조국의 품에 초현대식 생활을 하고 사는 것이 꿈만 같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18편
<독짓는 늙은이 왕옥자 할머니의 애국심>
한국전쟁 초기 서울이 공산권에 넘어가고 인민군이 장악하고 낙동강 최후의 전투가 한참일 때 우리 마을에서 약 8km 떨어진 덕정리에서 독을 만들어 구어서 팔아먹고 살아가는 왕옥자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국가 보훈처에도 등록되어 유공자 지정을 받은 실화를 소개하는 것이다.
왕 할머니가 며누님과 함께 덕정리 길을 고 있는데 인민군들이 국군 포로들을 끈으로 줄줄이 묶어 끌고 가는 광경을 보고 며누님과 짜고 국군을 구하기로 결심하고 굴비처럼 묶여 끌려가는 국군을 갑자기 붙들고 "야! 이놈아!! 심부름을 보냈더니 어데 갔다가 이렇게 끌려 오냐?"며 두 사람을 붙들고 통곡을 하니 며누리도 "여보~~!! "하며 손을 잡고 난리를 치니 끌고 가던 인민군이 총 개머리 머리판으로 가슴을 치며 쫓았으나 "애고! 나를 잡아가고 우리 아들 둘을 내 달라"며 가는 길을 못 가게 훼방을 놓으니 하늘에는 비행기가 폭격할 듯이 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고 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두 사람이 당신 아들 맞느냐고 확인을 하고 풀어주었다. 그 후 독을 굽는 가마 속에 두 사람을 숨겨 두었다가 국군이 들어 오자 풀어 주었는데 그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고 은인을 찾아 왕 할머님 집을 찾아 고마움을 전하고 국방부에 사실을 신고하여 그 왕 할머니는 그 지역 국가 행사 때 늘 내빈석에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때 살려준 국군은 장교로서 지금도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19편
<새신랑 매달리다 미군 총에 맞아 죽다>
우리 동네에서 7대째 외아들인 정동훈이가 군대를 나가 전쟁은 끝이 없이 계속되고 후손은 남겨야 하겠고 하여 장가를 들이려고 피난 나와 일 잘하는 처자 골라 결혼 날을 고 면장의 결혼 증명서를 받아 등기 우편으로 철원 지역에서 전쟁 중인 아들의 소속 부대장에게 보냈으나 오지 않자 부친께서 그 소속 부대를 찾아 갔으나 고지에서 전투 중이라 지금은 보낼 수 없으니 끝나고 내려오면 보내준다는 확인을 받고 돌아와 며칠을 기다린 끝에 동훈 형이 일주일간 결혼 휴가를 받아 돌아 왔다.
동네에서는 돌아온 정동훈 신랑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두 모여 난리를 쳤는데 어머니 말씀이 가서 보니까 벗어놓은 군복에 이가 깨를 뿌려 놓은 것같이 많아 삶아서 죽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윽고 색씨와 전통 혼례로 결혼식을 치르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하는데 옛부터 신랑이 장가드는 날이면 우리 동네 색씨를 데려 간다 하여 신고식 같은 것을 하는데 거꾸로 발를 묶어 매달고 두 사람이 어께에 끈을 메고 장작 큰 것을 들고 발바닥을 때리며 호통을 치면 신부 집에서 술상을 봐서 내어 놓고 그간 마음에 두고 있던 총각들을 달래는 행사를 하는 중에 그때 마침 미군이 마당을 지나다가 이상한 행동을 보고 한국인들은 머리도 빡빡 깎고 하여 적을 살해할 때 저렇게 하는구나 생각하고 영어로 "Is he the enemy?(이 사람 적군 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무도 그 뜻을 아는 이 없고 아는 단어가 "O. K." 밖에 몰라 그냥 "오케이" 했다. 그러자 미군이 "Could we kill him? (이사람 사살 해도 됩니까?)" 하고 또 물었다. 술들이 거나하게 취한 친구들은 "오케~오케이" 하며 웃으니 미군이 총을 들이 대고 "빵 ~빵" 두 방을 쏘아 7대 외아들이 장가 들러 휴가 왔다가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20편
<자유 우방국의 구제품과 크리스마스 전쟁>
모든 것이 부서지고 없는 조국의 대지(大地) 위에는 돌아온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밭에는 자주감자, 옥수수, 보리, 밀, 고구마, 팥, 수수 등을 심고 논에는 물을 대고 벼를 심었으나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기근이 심각하여 학교에서는 원조품 우유를 주는데 돌 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망치로 깨야 먹을 수 있는 유효 기간이 지난 우유를 주어 그것을 먹고 장이 나쁜 우리는 설사를 쫙~~ 하며 학교를 다녔다.
때로는 가끔씩 미군들이 트럭을 학교 운동장에 들이대고 자기들 나라에서 쓰다 버리는 헌옷 등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것을 서로 받으려고 밀려들고 난리를 치러 사람들이 다치는 일까지 있었으나 우리 어머니도 원피스, 검둥이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 을 받아다가 너무 커서 가위로 잘라내고 줄여서 입고 다니셨고 나는 예쁜 폴라 티를 운 좋게 받아 뻐기며 입고 다녔다. 학용품도 가져다 나누어 주었는데 크레파스와 연필은 참으로 좋았다.
크리스마스 때면 대대적인 선물 공세가 이루어져 학교 운동장이 주민들로 선물을 받으려고 아우성을 치는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하루는 경원선 덕정역 부근에 진입하는, 철수하는 인민군 기차를 비행기가 폭격하여 이북으로 가던 군인과 소, 말 등이 폭격을 맞고 죽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그 곳을 달려가서 아무거나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데 우리도 그곳에 끼어 불에 까슬린 고기덩이를 아버지가 주어들고 들어 와서 어떻게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고기가 사람 고기인지, 소나 말 고기인지를 판단 못해 속이 찜찜하다.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제21편
<고(古) 잡뿌리와 꿀꿀이 죽>
산은 빨갛게 속살을 드러내어 땔나무를 하려도 나무가 없으니 폭탄이나 아니면 고 잡뿌리라는, 스스로 죽은 나무의 뿌리를 캐어 지게 소쿠리에 담아 갖고 내려오는 것이 일상이 되어 학교가 파하면 지게를 지고 산으로 달려가 민둥산을 올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나무뿌리가 있는 곳을 찾아 도끼로 위로 올라온 썩은 나무뿌리를 힘차게 수없이 내려치면 그 뿌리가 흔들거린다. 그다음에는 온힘을 다해 손으로 잡고 빼어내어 하나하나를 모으면 한 소쿠리가 되어야 그것을 지고 집으로 와서 햇볕 잘 드는 양지쪽에 쌓아 두었다가 바짝 마르면 도끼로 쪼개서 담 밑에 쌓아 놓고 그걸 들여다가 불을 때어 구들장을 데우고 밥을 하고 화로에 재를 담아 온방밑 작은 요리를 해서 먹고 사는 처지이니 지금의 북한 실정이 내가 어렸을 때와 거의 같은 지경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비만 오면 토사가 나서 벌판을 휩쓸고 농작물을 모두 망쳐 놓고 사방공사라고 밀가루 한 되씩 주면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해마다 온 산을 다 하고 다녔으나 땔나무 때문에 모두 허사였다. 우리집 논도 개울가에 뚝을 쌓고 농사를 짓는 논이 약 2,000평이었는데 해마다 여름 장마철이면 개울 뚝이 터져 절반을 잃고 다시 동네 사람들이 모여 뚝을 쌓으면 그 다음 해에 또 수해를 당해 장례쌀 얻어 먹은 것 갚고 나면 먹을 것이 없어 겨울에 또 빚으로 장례쌀을 얻어 살곤 하였는데 후일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서 김현옥씨가 내무장관을 하며 입산 금지령을 내리고 나무를 못 하게 하고 연탄이라는 새로운 땔감을 보급시키면서 산이 푸르러지기 시작했다.
먹을거리가 없어서 초근목피로 살면서 칡을 캐서 먹고 도토리를 주어다 도토리 떡을 해 먹고 봄이면 들에 산에 나오는 새순들을 잘라 나물이라고 무쳐 배를 채우고 쌀이 없어 겨울에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장례쌀이라고 한 말를 꾸어다 먹으면 가을에 농사를 지어 한 말 반을 주는 고리 빚을 내어 먹다 보니 우리집도 계속 가난에 찌들어져 갔다.
내 고향에는 내가 못 가는 산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동네 어른들과 나물을 하러 멀리 있는 '장님산'이라는 곳으로 나물을 뜯으러 걸어갔는데 한낮이 되어 사람들이 점심을 먹자고 샘이 나오는 골짜기에 모였는데 어머니가 허리에서 풀러 내놓는 보자기에는 애기 손바닥만한 시꺼먼 개떡 세 조각이었다. 나는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빨리 먹고는 하나 남은 개떡을 손으로 잡으니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시어 축축 늘어진 다래나무 순을 뚝뚝 꺾어 샘물에 씻어 입에 넣고 어적어적 씹어 잡수시는 것이었다. 그 후에 내가 얼마나 잘못했나를 깨우친 날에는 어머니는 저 세상에 가시고 가슴을 움켜잡고 그 샘터에서 한없이 울었건만 어머니는 보이질 않아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
꿀꿀이 죽이라고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돼지죽, 잔반들을 수집해다 파는 집이 있어 돈을 버는 집은 그것을 사다가 영양 있는 것을 먹었는데 먹다 보면 딱딱한 것이 씹혀 뱉아 보면 담배꽁초가 나오기도 했고 고무줄이 씹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집은 돈이 없어 그것도 못 사 먹고 굶기를 밥 먹듯하며 학교라고 다녔는데 초등학교 졸업 사진에 한복에 조끼를 입고 여학생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찍었다. 사실 나는 사진 찾을 돈이 없어 사진을 못 찾고 있다가 2010년에 초등학교 선생님께 식사 대접을 하며 졸업사진이 없다고 하였더니 갖고 계신 사진을 주시어 밑에 실어 드린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22편
<목숨 보다 질긴 불타는 향학열>
피난에서 돌아와 5학년으로 편입되어 미군 천막을 교실로 시작한 초등학교 학업은 해가 갈수록 학구열이 불타서 형뻘되는 아이에서 둘째 동생뻘 아이들까지 뒤섞인 학급이었지만 기죽지 않고 일어나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중학교를 가려는데 집에서는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라고 하신다.
구정에 옛날에는 동네 어른들을 집집마다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면 어른들은 술상을 차려 대접하고 어린이들은 떡상을 차려 먹여 보내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는데 뒷골의 최돈화씨 댁은 원주에서 드럼통을 펴서 버스를 만드는 기술을 갖고 돈을 잘 벌어 일 년이면 땅을 몇 천 평씩 사는 집이였는데 그 곳에 가서 세배를 하였더니 최돈화 어르신이 내 손을 잡고 공부를 잘했다며 천 원짜리 빨간 지폐를 주셨다. 처음 보는 큰 돈이라 가슴이 떨렸다. 그 돈으로 부모 몰래 입학 원서를 사서 중학교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날이 다가오자 부모를 속인 것이 겁이 나서 벌벌 떨며 학교를 가 보았더니 학교 벽면에 합격자 발표문을 붙혔는데 학부형들이 몰려들어 보느라고 앞을 가려 키가 작은 나는 쭈삣거리며 뒤에 서 있는데 "민종아!! 너 2등으로 합격했다~!!" 하시며 담임선생님이 나를 번쩍 들어 어깨에 무등을 태워 주셔서 벽면을 보니 한문으로 두 번째 내 이름이 있어 눈물을 흘렸다.
집에 돌아와서 내방의 쪽문을 안으로 잠그고 그날부터 일절 식사를 안 하고 금식 데모를 하는데 어머니는 저 놈이 죽으려고 한다고 난리를 치고 며칠이 지났는데 저녁에 온가족이 이웃집에 마실을 다녀오시나 했더니 문을 부수고 나를 끄집어내며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이놈아! 너하고 나 하고 같이 죽자."며 내 멱살을 잡고 호숫가로 달려가 물에 빠져 죽자고 야단이시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버드나무를 붙들고 발버둥을 치니 어머니는 중학교에서 네 합격증이 우편으로 왔는데 장학증서까지 함께 왔으나 당장 교복을 사 입힐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자고 중학교 시험은 몰래 치렀느냐며 나를 잡고 대성통곡을 하시는 것이었다.
입학하는 날 어머니가 사다 주신 밀가루 부대를 염색하여 만든 얇은 교복을 입고 중학교를 다니는데 학교 선생님 중에 무서운 꼴통 선생이란 체육 선생님이 운동장에서 남녀 학생들을 모두 모아 놓고 중등 체육을 가리킨다며 남학생은 웃옷을 모두 벗고 열을 맞춰 서라는 지시가 교단에서 내렸으나 나는 웃옷을 못 벗고 망서리고 서 있으니 "너! 이리 나와." 하여 나갔더니 교단에 세우시고 웃옷을 벗으라 명 하신다. 할 수 없이 벗으니 내의도 없는 발가벗은 내 몸을 보고 여학생들이 깔깔 대고 웃는데 손을 들고 서 있으라 하여 체육이 끝날 때까지 벌벌 떨며 벌을 서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꼴통 선생은 나쁜 스승이었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제23편
<누구도 이기지 못한 쓸 데 없는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의 야욕으로 남침해 내려 온 전쟁도 3년간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파괴하고 우리의 뜻과는 관계없이 강대국에 의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서명하여 끝났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남 북한 사망자수: 443만여 명
남한군인 사망자 수: 137,899명
북한군인 사망자수: 215,000명
미군 사망자수: 36,000명
중공군 사만자수 :114,000명
6.25 한국전쟁, 휴전 협정을 체결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여가 지난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휴전 회담이 개최되었고, 7월 26일 정전 협상의 대상과 의제에 대해 양측이 합의하였습니다. 휴전 회담은 총 575회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휴전 회담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군사분계선 확정 문제로 북한과 중국군은 38도선의 원상회복을 주장하고 연합군은 현재의 군사 대치선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연합군 안으로 타결되었습니다. 둘째는 휴전 감시기구 설치 문제였다. 중립국 4개국으로 감시 위원단을 설치하는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연합군 측에서는 스웨덴과 스위스, 북한과 중국 측에서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추천하였습니다. 셋째는 포로 교환 문제로 이 문제는 18개월 동안 논란이 되었다. 연합군 측은 자유 송환을, 북한과 중국 측은 강제 송환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자유 송환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953년 4월, 6개월 동안 휴회 상태에 있던 휴전 회담이 재개되었고, 6월에는 휴전 회담 최대의 난제였던 포로 교환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953년 7월 22일 군사 분계선이 확정되었고, 7월 23일 송환 포로 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7월 27일 제159차 본회의에서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정전 협정 문서에 인민군 측 대표 남일 대장과 연합군 측 대표 해리슨 미 육군 중장이 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클라크(Mark. W. Clark) 연합군 사령관,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각각 정전 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정전 협정이 조인되었습니다. 휴전 회담을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 ( 퍼온글)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은 제 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념대립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군에 사회주의 체제를 성립한 구소련과 자본주의 체제를 성립한 미국이 각자의 목표를 위해 행동을 하다가 결국은 양국의 이념대립이 심화되고 그리하여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공산주의)진영 그리고 제 3세계의 진영으로 나눠지게 된다. 이때를 냉전시대로 일컬어진다. 그때 당시 한국은 일본에 광복을 한지 얼마 안 된 터이고 한반도 내부에서는 각각 미국과 구소련이 세력을 뻗치게 되었고 각자 단독 정부 수립을 하게 되었으며 2년후 구소련과 중국의 지원이 이루어 진다는 하에 북한의 김일성이 군대를 이끌고 남한을 침략하여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즉 더 세세하게 알아본다면 1945년 8월 15일 조선전역은 일제의 무조건 항복선언 방송으로 인한 일본인들의 땅을 치는 오열과는 달리 너도 나도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북부지역은 승전국이던 소련군이 진군하여 민중들의 함성소리에 씩씩한 걸음으로 의기양양하게 평양시와 원산시에 들어와 환영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편 남한에서도 한 달이 지난 9월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서 태극기를 들고 그들을 마중하느라 민중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마침내 서울에 당도하여 환영인파 속을 헤집고 당당하게 진주하였다. 얼마 뒤 북위 38도선이 그어져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북쪽에는 러시아식 공산 정권이 들어서서 스탈린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얼마 뒤 소련 연해주 지구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하고 귀국한 김일성이 지도자로 추대받아서 근 49년 동안이나 북한(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통치하게 된다. 남한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함에 따라서 지도자로 선출되어서 60년 하야할때 까지 남한을 통치하게 된다.
김일성은 소련식 공산주의를 유지하여서 동포들의 고역을 사유재산을 부정한다는 명목하에 마구 착취해대기 시작하였으며 강제노동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허리가 잘린 나머지 부분을 수복하기 위하여 소련의 원조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광복이 된지 3년만에 본격적으로 소련군의 지원하에 조선인민군이 창건되었으며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하여 남침을 위한 날을 벼르고 또 벼르기 시작하였다. 남한은 탱크 한대도 없었으며 제대로 된 전투기도차 거의 없었다. 북한은 이를 노리고 김일성을 앞세워서 소련으로 보내어서 스탈린과의 회담끝에 남침승인을 얻어내게 하였으며 스탈린은 여러차례 미국을 의식하였으므로 무모하게 전쟁을 도발하다가 제 3차 세계대전에 휘말리지 않을까 노심초사를 하였으므로 김일성에게 쉽사리 남침승인의사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김일성이 최후로 50년도에 마지막으로 모스크바를 방문 하였을 때에 비로서 남침을 허락하고 6월 달로 날을 정하여서 전쟁을 도발하게 된다.
2. 6.25전쟁의 의의
6.25전쟁은 민족 간 이념 갈등에 의한 내전이였다.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내전으로 한민족 역사에 기록되어지고 있다. 이후 남한과 북한의 분단은 완전히 정착되어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적개심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6.25전쟁은 냉전 시대의 개막을 알린 첫번째 전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미국과 소련,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파생된 냉전이란 양극 체제의 대표적인 피해 사례로 간주된다. 미/소 양 강대국의 이익이 충돌한(덤으로 중국까지) 국제 대리전이라고 할 수 있다. 6.25전쟁은 전쟁의 무대가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은 국지전이였으며 UN연합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첫번째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6.25전쟁후 일본 경제 부흥의 계기가 되었으며 제트 전투기 시대의 개막, 도미노 이론(한 나라가 공산화될 경우 이웃나라까지 공산화된다는)의 근거가 되었다.
3. 전쟁의 원인
1) 전쟁의 원인 중 내부적 요인
동아시아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 미국과 소련이 조장한 냉전이념의 충돌,
반공 이데올로기 등이 한국전쟁의 내부적 요인으로 속해있다.
한국전쟁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강대국의 이권다툼으로 벌어진 희생물인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장소가 한국일 뿐, 이 전쟁은 남한-북한 간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소련 간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비춰진다.
2) 전쟁의 원인 중 외부적 요인
우선 한반도에서의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가 전쟁의 초읽기임을 알 수 있다. 철수 후 1950년 1월에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시킨다는 애치슨 선언이 발표 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있어서 절호의 기회로 비춰져 북한의 남침 계획을 실행에 옮겨 ‘푹풍’이라는 작전명과 함께 1950년 6월25일 한반도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 에치슨 선언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애치슨 선언)은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이 한 선언이다. 여기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반도가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7년 10월 24일 등록문화재 제359호로 지정되었다. 유엔기념공원(UNMCK)은 1951년 유엔군(United Nations Forces:국제연합군) 사령부가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되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하여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조성한 유엔군 묘지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개성, 인천, 대전, 마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안치하였다. 처음에는 미국, 벨기에, 프랑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인도, 필리핀, 타이 등의 11,000위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자국으로 송환되고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터키, 미국, 영국 등 11개국의 2,300여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유엔이 1964년에 건축한 기념 예배당과 전시실, 부속건물 등이 있다. 이 중 예배당은 한국 건축가 김중업이 세계 각국 용사들의 종교를 고려하여 현대적이고 독특한 방식으로 설계하였다. 그밖에 한국에서 전사하였으나 무덤이 없는 영국연방군 386명의 용사를 추모하는 기념탑과 UN군 참전기념탑이 있다. 묘지 내의 초목은 대부분 각국 정부, 각 기관과 개인이 기증한 것이다. 무덤마다 고인의 기록을 담은 묘비가 놓여 있다.
195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기념묘지’로 지명한 세계 유일의 묘지로서, 세계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협력정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 의미가 큰 유적이다. 1974년 2월 16일 이후 이곳에 전사자의 유해를 봉안한 1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 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MCK)가 관리하고 있다. 사무소는 묘지공원 안에 있으며 건물은 UN이 관장하여 1968년에 건축하였다.
유엔기념공원의 역사
이곳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로서, 세계평화와 자유의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 장병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곳 묘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 년 1 월, 전사자 매장을 위하여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하였으며, 같은 해 4 월 묘지가 완공됨에 따라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지에 가매장되어 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가 안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5 년 11 월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아울러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955 년 12 월 15 일, 한국정부로부터 국회의 결의사항을 전달받은 유엔은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총회에서 결의문 제 977(X) 호를 채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59 년 11 월 유엔과 대한민국간에 “유엔 기념 묘지 설치 및 관리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유엔간의 협정” 이 체결됨으로써 지금의 유엔기념묘지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UNCURK, 엉커크)에 의해 관리되었으나, 1974 년 UNCURK 가 해체됨에 따라, 관리업무가 11 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
(Commission for the UNMCK)에 위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엔기념공원의 의의
외교적인 측면
이러한 유엔기념공원이 잘 관리되는 것은, 대한민국이 은혜를 아는 의리 있는 국가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인식시킬 뿐 아니라 형맹관계를 바탕으로 한 돈독한 외교관계의 초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적인 측면
유엔기념공원은 이러한 외교적인 측면 이에도 앞으로는 교육적, 관광적 측면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구전쟁에 참여했거나 목격한 세대들이 1세대 후에는 거의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유엔기념공원은 후세에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중요성에 대한 살아있는 현장교육을 하기 좋은 곳입니다.
관광적인 측면
또한 관광명소로서의 역할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세계 유일의 성지로서 전몰장병에 대한 참배와 더불어 이러한 특수성을 살리 볼거리 제공으로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될 수 있도록 가꿔 나가는 것이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 지원 및 전사자 현황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1950년 6월 28일 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의 이름으로 연합군을 파병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이는 현재까지 유엔군의 이름으로 세계 분쟁지역에 파병한 유일한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지원현황은 전투병력과 장비 등을 지원한 전투지원 16개국과 병원선, 의료진, 의약품 등을 지원한 의료지원 5개국 등을 포함하여 총 21개국이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참전하였습니다.
전투지원 16개국 : 미국,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공,
콜롬비아, 그리스, 태국,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의료지원 5개국 :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스웨덴 등
한국전쟁 기간 동안 (1950 년 6 월 25 일 ~ 1953 년 7 월 27일), 참전 21개국 중 17개국 (의료지원국 중 노르웨이 포함)에서 40,896 명의 유엔군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3) 6.25 전쟁의 결과
한국전쟁의 인적 피해에 대한 통계는 자료마다 다른데, 1970년 6월 27일자 통일조선일보의 통계에 의하면 150만여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서 5백만여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외국인을 제외하면 한국인 사상자의 수는 130만여 명이 되고 사상자는 4백만여 명이 된다. 당시 남한과 북한의 인구를 3천만 명으로 어림할 때 7명에 1명꼴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한 셈이다. 인구가 1천만 명이었던 북한의 경우 사상자의 비율은 4명에 1명꼴이었다.
물적 피해를 보면, 『현대 한국 정치의 전개와 동향』이 제시한 바에 의하면, 전력부문에서 전쟁 초기 남한의 발전능력의 약 80%를 잃었다. 국민총생산의 성장률은 1949년에 9.7%이었던 것이 전쟁이 일어난 후 1950년에는 마이너스 15.1%였으며, 1951년에는 마이너스 6.1%였고, 휴전이 한창 논의되기 시작한 1952년에는 8%로 처음 늘었으며, 휴전회담이 성사된 1953년에는 25.7%로 늘었다. 남한의 전력피해가 주로 전쟁 초기에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경우 8,700개의 공장과 기업소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공업생산은 전쟁 전에 비해 64%나 줄었다. 전력생산은 26%, 석탄생산은 11%, 철생산은 10%, 화학공업의 경우에는 23%로 각각 감소했다. 1950년 말 미군 지휘관이 "더 이상 목표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공언할 정도로 혹심하게 진행된 폭격은 3년의 전쟁중 북한 지역에만 1킬로미터 스퀘어당 18발의 폭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한 총 폭탄량을 상회하는 44만 8천 톤의 폭탄과 3,627만여 리터의 네이팜탄은 북한의 가옥 60만 호, 공장 8,700개소, 학교 5천 개소, 병원 및 진료소 1천 개소를 파괴했다. 평양에만 43만여 발의 폭탄이 투하되어 옛 건물로는 대동강변 일대만 파괴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평양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폭격으로 인해 37만 정보의 농토가 피해를 당했고, 9만 정보의 농경지가 감소했으며, 25만 두의 소와 38만 두의 돼지가 피해를 당했다. 전쟁기간중 농업생산은 76%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농민 가운데 빈농의 비중은 40%로 증대했는데, 이는 전쟁의 참상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북한은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형성해 나갔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본격화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시켰으며, 전후 복구과정에서 자립적 공업화 전략을 추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한국전쟁과 전후복구 과정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지도체제가, 이념적으로는 자주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주체사상이 형성되었다. 한국전쟁의 영향은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체제가 독특한 성격을 지니도록 만들었다. 전후 북한 사회주의에 미친 가장 커다란 특징적 영향은, 전쟁으로 파괴된 생산력을 전쟁으로 고양된 의식을 통하여 일거에 증대시켜 산업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경제적으로 남한이 세계 자본주의체제 속으로 편입되어 종속적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정치적 이념으로 강력한 반공독재체제를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남한이 정치경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어 자신의 자본주의체제를 재생산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6.25 전쟁 그 후
전쟁이 멈추자 양측은 각각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김일성은“남한의 북침을 저지했기 때문에 북한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세계 최강의 미국에 역사상 첫 패배를 안겨준 전쟁”임을 자랑했다. 반면 남한의 이승만은“북한의 남침을 물리치고, 남한 정부의 전복을 막았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전쟁의 결과는 남북한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남북한 모두가 전쟁을 전후해 인구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특히 북한은 전쟁 중 많은 인구손실과 함께 대규모의 인구가 월남함으로써 인적 자원 면에서도 상당한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북한체제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월남함에 따라 공산정권으로서는 보다 쉽게‘김일성 독재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이점도 있었다. 또한 북한은 세계 최강의 미국과 전쟁을 치름으로써 제3세계로부터 주목을 받게 됐으나, 이로 인해 서방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의 길을 걷게 됐다. 북한의 사회주의화 정책은 더욱 가속화됐다. 1958년까지 기존의 개인경영 상공업과 개인농업을 없애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함으로써 사회구조를 완전한 사회주의 체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오늘날과 같은 경제 붕괴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임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후 남한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전쟁은 남한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국토가 좁은 남한에서도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대규모 인구이동이 있었다. 전쟁이전 북한에서 월남한 인구의 대량유입과 1·4후퇴로 인한 중부권 인구의 이동, 전후 도시화로 인한 인구이동이 그것이다.
1953년 7월 27일 10시, 군사정전협정이 발효된 이래 50년 동안 남·북한 군인 130여 만명이 이를 준수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인원만 해도 한국군 496명을 비롯하여 미군 221명 등 무려 7백여 명에 달하고 있다.비무장지대 내에 200~500m 간격으로 설치된 1,292개의 군사분계선의 표지판은 남북 분단의 현실을 잊은 듯, 비무장지대의 능선과 계곡, 그리고 산야를 완전히 변화시킨 무상한 세월의 흐름 속에 희미한 잔해만 남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한반도의 허리부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간 첨예한 군사적 대치 상황은 군사분계선의 존재를 엄연한 현실로 일깨워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처럼 군사분계선은 평소 세인(世人)들의 뇌리 속에는 잊혀진 망각의 존재처럼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냉전의 유산으로 분명히 현실속에 존재하는 실체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5) 6.25전쟁이 주변국에 미친 영향
국제 정치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한국 전쟁은 2차 대전의 종결 이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세계적 차원의 냉전구조를 확립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대립, 상호군비경쟁을 가속화시켰고, 그것은 냉전구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6ㆍ25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 공산주의 세력이 미국을 한반도로, 나아가 만주로까지 유인해 심대한 군사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동서냉전의 초기단계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령하겠다는 계산 하에 치밀하게 기획한 국제전이었다.
○ 일본
* 6.25 전쟁의 최대 수혜자
* 전쟁의 후방기지와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급성장
* 제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6.25 전쟁을 통해 만회하게 됨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북한, 중국, 구소련의 대륙세력과 미국, 일본, 남한의 해양세력으로 이분화되어, 일본은 일제의 36년 한반도지배가 자신들이 러시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함, 곧 공산화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미화시킨다.
일본은 6.25 전쟁의 수혜자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대전 후 일본의 재건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처럼 보일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6.25 전쟁의 후방기지와 병참기지로 변모하면서 급속히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치체제와 경제의 기초가 이 전쟁 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공산당은 북한측에 서서 전쟁에 가담한 결과 국민의 지지를 잃었지만, 사회당은 전쟁의 와중에서 비무장 중립노선을 취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일본의 전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967)는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이 우리 일본을 구하셨다”고 감격해 하면서 만세삼창을 했고, 1954년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한 세미나에서 “한국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고 말했으며, 커밍스는 “뉴딜(New Deal)이 금세기 미국의 제1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면 한국전쟁은 제2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고 평가하였다. 1953년 한국전쟁에 해군장교로 참전한 미국경제학자 찰머스 존슨 (Chalmers Johnson)도 “일본에 있어 한국전쟁은 마셜플랜에 필적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고 진단한다. 한반도의 비극 위에 전후 일본의 발전이 시작된 셈이다.
○ 중국
* 6.25 전쟁으로 막대한 인적, 경제적 피해를 입음
* 침략국으로 낙인 찍혀 이후 근 20년 동안 국제외교 무대에서 고립됨
* 참전을 통해 국제사회에 신생 중국의 존재를 알리게 됨
92만여 명의 인적 손실을 입은 중국은 참전에 따른 막대한 전비조달로 신생중국 경제 건설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긴 하였으나, 미군의 공격을 저지함으로써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였고, 이는 국제무대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결과를 낳아 그 후 비동맹운동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갓 태어난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희생이 많은 전쟁이었지만, 미국과 대등하게 싸운 전쟁을 통해 그 지위를 완전히 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중국의 통일을 가로막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대만해협을 봉쇄했고, 그로 인해 중국은 사실상 대만 통합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중국은 국내 경제 건설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외국자본의 유치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자력갱생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과 미국에 의해 침략국으로 낙인 찍힌 중국은 외교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 이나 지난 뒤에야 미국과 국교관계를 수립했고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전쟁 참전으로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였고, 제 3세계로부터 상당한 지지와 호응을 얻었다.
○ 미국
*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 * 6.25 전쟁을 계기로 이후 베트남전 등 여러 국제 분쟁에 개입* 소련을 무너뜨리고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됨
미국의 참전이유는 ‘아시아에서 미국을 시험해보기 위한 공산주의의 도전’을 처음부터 물리쳐야 된다는 전략적 판단에서이다. 그리하여 소식을 접하자 주저하지 않고 개입한 결과 미국은 무려 500억 달러가 넘는 전비를 투입하고 연인원 180만여 명의 병력을 참전시켜 14만여 명에 이르는 인원피해를 입게 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러나 미국은 주도적으로 유엔군을 이끌고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유세계의 리더의 자리에 올랐고 이를 기회로 이후 베트남전쟁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분쟁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면서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절대 강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위치를 점하게 되는 시초인 것이다. 이후 미국은 한국에서 물러날 수 없는 이해관계의 당사국이 됐다. 그 결과 1953년 10월 한국과 미국 사이에 군사적 동맹이 체결됐다. 피로 맺어진 동맹이었다. 이후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원조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하도록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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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 미국의 대만해협 봉쇄 조치 덕분에 중국의 침입을 면함* 이것을 계기로 자주국가로 독립
당시 분단국이었던 대만의 장개석은 6·25전쟁으로 천금 같은 시간을 벌게 되어 중국의 대만 침입을 면하게 된다. 사실 6·25전쟁에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분쟁을 벌일 곳은 타이완이었고 만일 그랬다면 미국이 굳이 개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공산주의 체제를 저지하기 위해 중국도 제재해야 할 상대로 판단한다. 그 결과 미국은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제7함대로 대만해협을 봉쇄하는 전략적 조치를 취하였고 이 덕분에 대만은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 소련
* 전쟁 발발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국제 사회의 외면*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공산권 국가들마저 소련을 비난함*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 추락
미국의 맞상대였던 소련은 전쟁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비난을 받았을 만큼 전쟁 시작의 실제 당사자이면서도 얻은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중국과 북한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공산권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는데, 중국을 전쟁에 끌어 들여 미국과 동시에 약화시키려는 책략을 꾸몄다는 의심까지 받았을 정도로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외면당하는 신세에 처한다. 때문에 휴전 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자신들과는 다른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중국과는 적대적 관계로 서서히 변하여 1960년대 들어서 중소이념분쟁을 벌이는 지경에까지 발전한다. 중국은 이후 79년 미.중 국교정상화를 체결함으로써 같은 공산권 국가인 소련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결과로까지 이끈다. 전 미 국방부 장관 헨리 카신저는 미국과 중국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모두 있지만 최대의 패배자는 소련의 스탈린이라고 평가한다.
5. 나아가야 할 길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왔다. 수많은 자식 잃은 부모, 부모 잃은 고아, 남편 잃은 여인, 파괴된 고향산천, 그리고 고향을 떠난 온 실향민들, 이 많은 민족적 고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때 우리 민족의 아픔은 점차 희석되고 또 망각되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반세기란 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의 후유증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세상에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이자 중무장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분쟁의 위험이 가장 큰 지역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55년 전 그 날 이 땅위에서 일어난 6·25전쟁의 참화는 우리의 국방미비가 불러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 6·25전쟁의 결과는 경악과 참담, 그 자체였다. 개전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하루아침에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섰던 사실을 절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과거를 쉽게 잊어버린 민족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말과 같이 6·25를 상기하면서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국방과 안보체제를 확고히 하는 귀중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6.25 한국전쟁, 휴전 협정을 체결 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여가 지난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휴전 회담이 개최되었고, 7월 26일 정전 협상의 대상과 의제에 대해 양측이 합의하였습니다. 휴전 회담은 총 575회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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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회담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군사분계선 확정 문제로 북한과 중국군은 38도선의 원상 회복을 주장하고 연합군은 현재의 군사 대치선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연합군 안으로 타결되었습니다. 둘째는 휴전 감시기구 설치 문제였다. 중립국 4개국으로 감시 위원단을 설치하는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연합군 측에서는 스웨덴과 스위스, 북한과 중국 측에서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추천하였습니다. 셋째는 포로 교환 문제로 이 문제는 18개월 동안 논란이 되었다. 연합군 측은 자유 송환을 북한과 중국 측은 강제 송환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자유 송환으로 결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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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6개월 동안 휴회 상태에 있던 휴전 회담이 재개되었고, 6월에는 휴전 회담 최대의 난제였던 포로 교환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953년 7월 22일 군사 분계선이 확정되었고, 7월 23일 송환 포로 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7월 27일 제159차 본회의에서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정전 협정 문서에 인민군 측 대표 남일 대장과 연합군 측 대표 해리슨 미 육군 중장이 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클라크(Mark. W. Clark) 연합군 사령관,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각각 정전 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정전 협정이 조인되었습니다. 휴전 회담을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6.25 사변 참전 희생자.
미국; 전사자 33,665, 비전투 희생자 3,275..총 36,940 명이 젊은 목숨을 한국전쟁에 바쳤다.
총 103,284 작전에서 92, 134 전상자를 냈으며,
총 1,789, 000명의 미군이 1950, 6.25부터 1953, 7.27일까지 한국전에 참전햇고,
어직도 8, 176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한국군은 전사자 415, 004명을 포함한 1, 312, 836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U.N은 전사자 3, 094명을 포함 총 16,532명이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
-사진출처-국가유공자 환경운동본부.
나라위해 희생한분들이 홀대받는 세상은 더 이상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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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받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하신 그 무엇과 비교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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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사회를 보면 나라위해 희생하신 분들보다 일반사고로 희생한 희생자가 더 추모 받고 정치화 사회화 이슈화 되면서 가치관의 혼란이 오고 있어 안타깝다. 이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지난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만 보아도 그렇다. 수개월간 나라전체가 흔들거리다 시피 하며 그나마 일어서던 경제를 가라 않게 했다 그 휴우증은 아직도 국민들의 소비를 멈추게 하고 있다고 본다. 온통 나라전체가 노란리본으로 정치화되면서 정치권의 활동도 멈추게 하다시피 했다고 본다. 이제 그 결과는 소비부진으로 경제 한파를 맞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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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열된 추모와 정치화되면서 결국 경제는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연말을 맞고 있다고 본다.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전체를 흔들거리게 하고 난리를 쳤지만 침몰한 배에서는 한사람도 구조하거나 살아남지 못했다. 결국 시신으로 인양했고 몇 명은 아직도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선박인양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에 올 한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우리사회의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무섭고 큰문제인지 깊이 인식하고 깨닫는 게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안전 불감증이나 안전의식 부재는 여전하다고 본다. 이제는 사건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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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해 경주 리조트 붕괴 사건이나 이번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천문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동안 나라위해 희생한분들에 대한 처우나 보상은 턱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건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본다. 꼭 금전적 보상뿐만이 아니다. 사회적 이슈화 정치화되면서 그런 사건의 희생자들이 나라위해 희생하신 분들보다 더 사회적 관심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나라 정치인들은 과연 역사관이 있는지 되묻고 반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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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항일독립투쟁을 하며 수많은 애국지사와 항일독립투사 그리고 미발굴독립유공자분들이 나라를 위해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을 하셨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분들의 명예를 다 찾아드리지 못한 채 광복 70주년을 맞게 된다.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서 국내에서 국외에서 만주벌판에서 수많은 항일투쟁을 하셨다는 사실은 반드시 기억하고 나라사랑정신을 본받고 교훈삼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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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동족상잔인 6.25를 겪었다. 호국영령과 참전용사들의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금년이 6.25전쟁 제65주년이자 정전협정과 한.미 동맹 제62주년을 맞는다, 오늘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64주년이 되겠습니다. 想起하자 6.25 戰爭 그 슬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자라나는 전후 세대들도 무관심이 아닌 관심과 그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잊어진 전쟁이 아닌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본다. 이 나라 전쟁을 위해 싸워 희생하며 자유와 평화를 찾아준 참전용사들 고귀한 희생 앞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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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動亂 參戰 犧牲者 실로 엄청나고 그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美國軍은 전사자 33,665명, 비전투 희생자 3,275을 포함하여 총 36,940명의 젊은 목숨을 바쳤다. 또한 103,284건의 작전에서 92,134 명의 전상자를 냈으며 총 1,789,000명의 미군이 1950.6.25.일부터 1953.7.27일까지 한국전쟁에 참전 했으며 아직도 8,176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韓國軍은 피해는 전사자 415,004명을 포함하여 총 1,312,836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아직도 미송환 국군포로가 북한에 억류되고 있는 현실이다, U.N 軍은 전사자 3.094명을 포함 총 16,532명이 희생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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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이 아니다. 자유화 평화를 위해 지난 1960년대 파병한 월남전 참전이다. 건군 이후 최초 최대 파병이다. 월남파병 제50주년을 맞는다.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32만 명의 장병을 보냈으며, 그 전장에서 "5000명 목숨 바친 월남戰 파병하여 한.미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 우리 한국군은 대대급 이상 작전 1100회, 소부대작전 57만회를 수행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고, 휴전선 전방부대에 미군이 지원한 M16 소총을 보급하는 등 군 현대화를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동북아에서 월남전 이후에 가장 강한 헬기전력을 갖게 된 것도 대한민국이었고 그런 바탕에는 베트남전이 국방장비 현대화에 전초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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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 기틀도 마련하게 됐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87달러 불과했던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개발 차관과 파병 군인 임금 외에도 군수품 수출과 건설업체의 베트남 진출 등으로 5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였고 그 효과는ㅂ자로 한국 경제발전에 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참전 용사들의 고엽제 피해, 파병 용사와 베트남 현지인 사이에 태어난 라이따이한 문제 등 어두운 면도 적지 않고 그들의 전쟁 휴우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이다. 국가로부터 받는 연금도 적은 액수를 받고 있다고 본다. 요즘 발생하는 일반사고 보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본다. 앞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신 분들이 어떻게 예우 받고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다시한번 깊이 반성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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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은 몸소 실천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치신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이 제대로 대우받고 존경 받을 때 나라사랑정신이 빛나게 되고 후세들이 본받고 교훈을 삼게 될 것이라고 본다. 정부는 이제라도 일제강점기 나라위해 희생하신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잊어지거나 잃어버린 그 명예를 찾아주는데 전력을 기울려 나가야 하며 지난 6.25전쟁에서 희생하시거나 전장에서 희생했어도 시신조차 차지 못한 희생과 발굴과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미송환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을 기울려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월남전 참전자들에 대한 처우개선과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 질수 있게 최선을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제대로 격에 맞게 예우 받고 존경받을 때에 나라사랑정신이 꽃피우게 될 것이라고 본다. 자라나는 후세들도 본다고 교훈 삼게 되기를 아울러 바란다.
글쓴이/정병기<칼럼리스트. 보훈가족>
북한의 몰락은 김씨 왕조의 3대 세습이 그 원인 이다
냉전은 자유민주주의 - 자본주의 세력이 경제적으로 압승을 거두며 끝났다. 공산주의의 실패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국가가 아직도 경제적으로 열세에 있는 원인이 되었으며, 시장주의 경제 체제가 경제 성장에 우월함을 증명했다. 하지만 북한이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점은 체제 실패만을 원으로 꼽기 부족한 면이 있다. 북한 경제는 폴란드, 체코 등 옛 동구권 국가에 비해서도 처참할 정도로 열악하며, 정치∙사회∙외교의 불안함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후에도 북한이 못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80년대 잇다른 정책 실패
1970년대만 해도 북한은 한국보다 경제적 우위에 있었다. 6.25이후 풍비박산 난 한국과 달리 북한은 일제의 산업기반 시설이 남아있었고, 1960년대부터 닦아둔 경공업을 기반으로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부턴 농업 기계화를 추진해 대내 농수산물 수요를 충족했고, 식료품 배급에도 문제가 없어 주민들은 북한이 사회주의 낙원으로 발전할 거란 장미빛 전망에 취해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1980년 후반 대형 정책을 잇따라 실패하며 북한 경제 위기가 시작됐다. 첫 번째 실패는 '서해갑문 건설 계획'이었다. 서해갑문은 남포시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한 갑문(수면 높이가 다른 두 수역을 연결한 수문)으로,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도로 역할도 하고 있다. 본래 1981년 착공해 3년 이내 완공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북한 토목 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5년 만인 1986년에야 완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실공사로 인한 누수와 파손으로 지금도 보수공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완공후 대동강 유역 기후가 변화해 초래해 농어업 생산량이 급감하는 문제를 초래했다. 이 댐을 건설해 발생한 손실은 70억 달러에 달했다.
두 번째 실패는 평양에서 개최한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 본래 냉전시기 사회주의 국가 청년 행사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최되던 행사로,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극받은 북한 정부가 의욕적으로 개최했으나 이후 동구권 공산 독제 체제가 붕괴되며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했다. 순안공항 확장, 광복거리 조성, 류경호텔 건설 등 대규모 건설사업을 벌였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자 당초 예상했던 관광수입을 기대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소모된 지출금은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손실액은 약 40억 달러로 추정된다
마지막은 '순천비날론연합 기업소' 건설 실패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에서 400여 가지 화학제품을 생산해 경제적 효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다. 김일성은 의류원단인 비날론에 "주체 산업"이란 타이틀을 붙이고 대량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비날론 생산은 대규모 생산시설을 필요로 했고, 제조단가도 비쌌으며, 원자재 못지 않게 많은 폐기물이 나왔다. 특히 생산과정에서 소요되는 전기량이 많아 전력 부족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생산된 비날론의 품질도 문제였다. 염색이 힘들어 다양한 색을 낼 수 없었고, 착용감이 뻣뻣하고 보온성이 떨어지는 등 옷감으로 부적합했다. 열기에도 약해 줄어들거나 탈색되기 일쑤였다. 당초 예상했던 세계 수출은 실현되지 못했고 북한은 이 사업으로 100억 달러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 위기 극복 못했다... 고난의 행군
80년대 정책 실패는 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이어졌다. 대기근 발생으로 인해 북한 정부의 쌀 배급량은 급속히 줄었고, 배급에만 의존해 살던 북한 주민은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자연스럽게 장마당 형태의 시장 경제 체제가 들어섰고, 이는 중앙집권적 경쟁 체제가 약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80년대 실패가 경제적인 것에 그쳤다면, 고난의 행군은 북한의 정치 사회 시스템까지 위협했다고 볼 수 있다.
대기근이 발생한 원인은 김일성이 주장한 '주체농법'에 있다. 이 농법은 부식토에 미리 강냉이(옥수수)알을 심어 싹을 틔운 뒤 밭에 옮겨심는 방법인데, 평지가 부족한 북한의 특성상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락밭을 옮겨다니며 심어야 했다. 작물이 옥수수인 탓에 인력소요가 커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이 감퇴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지력(地力)을 많이 소비하는 옥수수를 주 작물로 선정한 탓에 지력 고갈이 가속화됐다. 여기에 이상 냉온 등 자연재해까지 겹치자 북한 주민은 당장 입에 넣을 곡식 몇 알을 구하지 못해 배를 곯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북한 외무성은 당시 22만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나, 탈북자 황장엽은 회고록에 아사자만 300만명이라고 적었다. 살아남은 자들도 지난친 영양결핍으로 장애가 생기기 일쑤였고, 10~20대 평균 신장은 150Cm대로 줄어 '발육부진 세대'란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1994년 GNI는 1인당 400달러에서 1995년에 200달러로 급감했고, 이후 2012년까지 600달러를 회복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도 시장화 부작용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졌고, 노동당원 등 일부 출세 계층과 일반 주민 간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 자생적 자본주의 시도하지만.... 심각한 부정부패로 개선 여지 보이지 않는다
북한 노동당은 건립 55주년 행사에서 고난의 행군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실상 고난의 행군 도입기인 90년대 초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북한 경제는 자생적 자본주의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증 소지법 등 시대착오적 법령은 시장 경제 발달에 악영향을 주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살아남기 위해 뇌물 수수를 선택한다. 상인의 봇집과 발로 인해 시장은 조금씩 팽창하지만 부정부패란 비합리적, 비합법적 규제로 인해 북한이 경제가 회복할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80년대부터 시작된 북한 경제의 몰락의 본질은 공산주의의 한계보단 북한 김씨 삼부자의 무능 탓이 크다. 그들은 잘못된 정책을 추진해 북한 주민을 경제적 나락으로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특권화 책임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 덕에 북한은 멸망이 가까운 비정상 집단이 되었고 남북 통일의 길은 더 멀어졌다.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한 탓이라며 북괴 수장의 짐을 덜어주는 주장을 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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