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수양**/느낌이있는방

닮고싶은 유수봉할배

빈손 허명 2010. 1. 31. 07:03

"봉사는 내 가진 것 다 주는 일"

 

  

경기도내 무료 급식소 5곳 꾸려온 유수봉 노인의 `무한 봉사'
후원금 한푼없이 매일 채소 팔아 하루 500명에게 점심 제공
100억 재력가서 알거지 된 후 10년째 봉사.."하루 3천명이 꿈"

 

가진것 없으니 줄 것 없고, 줄것 없으니 받을 것 없어"


인생살이는 농사일 같아서 황혼길이 더 바쁘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못다 한 일은 잠을 설쳐가면서라도 빨리 끝내고 가야지, 할 일 남겨놓고 눈 감을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그가 말하는‘해야 할 일’이란‘나눔’을 말합니다. 남의 것 가져다가 생색내며 도와주는 것 말고, 자신의 살을 떼어서 돕는 나눔을, 저 세상 가기 전에 실천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경기도 하남의 재래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하는 유수봉 할아버지. 그는 벌써 7년째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위해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자신은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해 움막 생활을 하면서도 한 달에 천만 원, 1년이면 소형 아파트 한 채 값을 나눔을 위해 쏟아 붓는 유수봉 할아버지…. 그런데도 후원금도 지원금도 일절 받지 않는 유수봉 할아버지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만나보았습니다.

(내용 요약 ; 인용자)

 

                                


▶ 점심만 무료급식을 하고 계시는데 하루에 몇 분 정도 오세요?

▷ 400명 정도 옵니다.


▶ 매일 400명 정도의 식사를 준비하고 드시려면 장소가 문제일 것 같은데 천막을 이용하시나요?

▷ 제가 사는 집만 움막이고 장소는 거의 건물을 임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 하루에 급식비가 얼마나 들어가나요?

▷ 아주 절약해서 만든다고 해도 밥 한 끼에 천 원가지고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국과 밥, 1 식 3 찬을 하는데 천 원에 만들기가 힘들어요. 천 원짜리 우스운 것 같아도 400그릇이면 사십 만원이고, 한 달 25일 이면 천만 원이에요. 일 년에 1억 2천 내지 1억 5천 아니면 못 하죠.천 원짜리 우스운 것 같아도 그릇 수가 많으니까 액수가 많더라고요. (웃음)


▶ 한 달이면 천만 원이 드는데 제가 알기로는 후원금을 일체 안 받는다고 들었어요. 안 받는 이유가 뭔가요?

▷ 남의 살 떼어다가 남 주는 봉사사업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싶어서 우선 내 것 먼저 쓰고 내 몸 먼저 이 사회에 바쳐보고 나중에 정 안됐을 때 남의 도움과 후원금, 보조금이 필요하지 않는가 싶어요. 내 능력도 다 써보지 아니하고 남의 것 먼저 쓰자고 하면 이상한 얘기 같아서 우선 내 뼈와 살 깎아서 하는 봉사를 먼저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 얼마나 되셨지요?

▷ 나누는 봉사는 20년이 넘었는데 밥을 대접하기 시작한 것은 7년 정도 됐어요. 장애인 촌에 쌀과 부식을 공급해 주고 겨울에 추울 때는 노동자들이 일 하러 가기 어려우니까 쌀을 한자리에 100가마씩 놓고 돌리고 그랬어요. 그런데 안 가져가야 할 사람도 보니까 가져가더라고요. 겉으로는 가난해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거의 40% 이상이 그래요. 100가마를 놓고 나중에 조사를 해 보면 40명 이상이 그런 사람들이에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고 차라리 밥을 해주는 것이 낳겠다 싶어서 7년 전부터 밥을 해주기 시작했지요.


▶ 야채장사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한 달에 천만 원이 가능한가요?

▷ 저에게는 하나의 천명인 것 같아요. 무료급식을 하기 위해서 야채장사가 시작이 된 것 같아요. 제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가 전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맨몸이 되었는데 장애인들이 몸이 아파서 돈 벌러 가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제가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더라고요. 벼 베고, 논에서 나락도 줍고, 밭도 갈면서 품삯을 팔았더니 쌀 다섯 되를 주더라고요. 그때 두 되는 제가 먹고 석 되는 장애인을 주기 시작한 거죠. 그러다 경운기를 가지고 밭도 갈러 가보면 다섯 말로 불려져요. 그러면 너 말 여덟 되를 남을 주고, 두 되만 집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쌀을 백 가마를 줘도 집에는 쌀 한 포대만 가지고 들어갔죠.


▶ 어떻게 그렇게 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 남을 도와주려면 우선 내가 먼저 욕심을 버려야겠더라고요. 내 욕심을 자제하려니까 갖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하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돈이 불려져도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 하루에 야채가 400만 원에서 500만 원이 팔리는데 그 돈은 내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돌봐주기 위해서 불리는 돈이라고 생각하죠.


▶ 어디서 장사를 하세요?

▷ 하남에서 가게도 없이 길거리에서 팔아요. 처음에는 농사를 지어서 조금씩 가져다 팔았는데 땅이나 집을 사지 않고 전부 이웃에 돌려주니까 시민들이 눈으로 보고 느끼더라고요. 저 노인네한테 파 한 단, 배추 한 단이라도 팔아주면 그 이익금이 다 어려운 이웃에게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민들이 몰려와서 팔아주시니까 돈 받을 시간도 없어요.


▶ 보통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세요?

▷ 잠자는 시간은 죽은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차에서건 어디서건 일정하게 자는 시간은 없어요. 보통 밤 12시가 넘어 자고, 새벽 4,5시에 일어나서 아들과 용달 3대로 가락시장에서 야채를 실어 와서 아들, 며느리, 집사람, 온 가족이 장사를 하죠. 그러면서 아들에게 흥부전 이야기를 하면서 이 돈은 우리 돈이 아니라고 말해요.


▶ 개인 통장도 없다고 들었는데 돈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 매일 이삼일 전에 번 것을 이삼일 후에 쓰는 거죠. 한 달에 4,5백 매출이면 일 년이면 십억이고 20%가 남는데 2억이면 급식비가 딱 떨어지는 거죠. 단 한 가지 문제는 식구들 관립니다. 식구들도 욕심을 버려야 하니까 돈을 돈으로 보면 안 됩니다. 돈의 가치를 물질로 보면 안 되니까요.


▶ 옛날에 굉장히 돈도 많이 버시고 회사도 크게 운영하셨다고 들었어요.

▷ 50년째 제가 바보구실을 하는데 그때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죽 그릇을 못 면했어요. 그래서 내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17,18살 때 고민을 하다가 동네 사람들이 다 못 먹고 사니까 할아버님께 소 한 마리만 팔아달라고 했더니 할아버님이 아버지에게 제 공부시키면 집안 말아먹는다고 책가방 치우라고 난리셨어요.

당시 안성에서 만평이상의 땅을 가지고 있으니 지금 시가로는 100억 원이 넘어요. 그걸 전부 팔아서 농수산진흥청과 농림부에 가서 유럽의 영농기술을 배우자 해서 영농방법의 기계화를 위해 투자를 했죠. 그때는 땅을 다 내놓아도 식량혁명을 일으킬 힘이 안 되더라고요.


▶ 그 땅을 다 파셔서 사업을 하신 건가요?

▷ 기계화시키려고 기계 연구하는 비용으로 다 없앴지요. 그리고 식품공장을 했는데 부도가 나고 해서 잘 안되더라고요. 내 모든 것을 내버리고 손바닥만 가지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잠도 자보고 그러다가 비닐하우스에서 움막이라도 짓고 살면서 돈 없다고 원망할 게 아니라 건강하니까 품팔이라도 하면서 살자 그랬죠.


▶ 100억대를 날리고 혹시 죽고 싶지는 않으셨어요?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

▷ 그때나 지금이나 건강한 마음의 틀은 컸지요. 대한민국을 내 등에 업고 먹여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였으니 시시한 일에 마음의 좌절은 안 했죠. 그래서 지금도 대전, 대구, 부산까지 하루에 3,000명을 먹일 수 있게끔 노력을 해보겠다는 것이고, 돕고 싶어 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한데 묶어서 할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봉사하는 이웃돕기에 하나의 계몽적인 차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 저는 늘 하는 말이지만 후손들에게 나눠 먹는 마음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가난해도 마음 문만 열면 도와줄 수 있다는 걸요... 몇 백 억씩 가지고 있어도 조금 더 벌면 그때 가서 돕겠다는 사람들이 좀 많습니까? 이렇게 저같이 가난한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본을 보여주고 싶고 그리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검소한 생활을 먼저 하자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보고 저 사람은 평생 움막 쳐놓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옛날에 잘살던 대로 집사고, 땅 사면 남을 도와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 욕심을 버리겠다는 고삐를 거기에 매 놓고 있는 거예요.


▶ 잘 사실 때는 어떠셨어요? 사치도 하고 그래 보셨나요?

▷ 농촌운동이나 그런 것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그렇게 돌아가지를 못했죠. 건전한 마음으로 이 사회를 도와줘야겠다는 한 번의 마음이 50년을 가고 있으니 그런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나 싶어요. 어렸을 때도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집 소를 왜 못 파느냐고 할아버지한테 따지고 그랬으니까요.


▶ 집이 움막이시라고 했는데 어디세요?

▷ 하남시와 서울의 경계 지점에 30년 전에 비닐하우스를 쳐서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어요.


▶ 겨울에는 어떻게 하세요?

▷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면 동상 안 걸린 식구가 없죠.


▶ 손은 왜 그러세요?

▷ 젊었을 때 농기구 만지다 다쳐서 잘렸어요..


▶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나 되나요?

▷ 생활비는 없지요. 야채 있겠다, 밥 주는데 밥 있겠다, 따로 계산할 게 없잖아요. 별도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동고동락하는 것이 마음을 열어주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 부인과 두 분이 여행을 다녀 본 적은 있나요?

▷ 제주도도 한번 못 가봤어요. 신혼여행으로 안성 성환 목장을 갔다 온 것이 전부인데 집사람이 겉으로 얘기는 못 하지만 미워할 거예요.


▶ 성환 목장은 왜 가셨어요?

▷ 앞으로 우리 국민들이 먹고살아야 하는 방법이 농어촌과 관련이 있고 한 시간이라도 다른데 활용하지 말고 성환 목장에 가서 어떻게 소들을 키우나 보고 잘 생각해 보자고 해서 간 거죠.


▶ 제가 볼 때는 유수봉 할아버님의 결심이 워낙 굳으시고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까 가족들은 그냥 포기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 만약에 제가 돈이 좀 있다고 해도 아들과 딸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에게도 저는 ‘제로의 인생’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가진 것도 없으니 줄 것도 없고 줄 것이 없으니 너희들에게 받을 것도 없다고 해요.

 

 

 

 


▶ 장학금 기부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 저는 사회적인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양극화와 더불어 결손가정이나 저소득가정의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겁니다. 사회봉사가‘은’이나 동’이라면, 장차 꿈나무인 그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은‘금’과‘다이아몬드’입니다. 그 아이들이 커서 이 나라의 주인이 될 텐데 경제적인 서러움을 받고 있어요. 이것은 사회가 해결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1층에서는 무료급식을 하면서 2층에는 그 아이들이 공부도 할 수 있고 저녁밥도 먹고 갈 수 있게 하고 있어요. 그 아이들의 마음을 돌봐줘야 하는데 현재 각 시마다 무료급식소에 개소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고 용인부터 시작을 하고 있어요. 옛 성인들은‘내’자식,‘네’자식을 구분해서 말씀하신 게 없잖아요. 시민들과 마음을 합해서 모두를 내 자식으로 돌봐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관심과 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출처] 유수봉 할아버지|작성자 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