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량면은 삼한 시대에 변·진(弁辰)의 한 나라인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소국의 소재지로서 지금의 압량리에 도읍하였는데 임금의 성씨와 건국의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압독국을 취하여 군(郡)을 두었고 다시 선덕여왕 11년(642)에 김유신 장군이 군주(軍主)로 다스렸던 곳이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둘째 아들이었던 김인문(金仁問)이 총관으로 재임하던 시적 지금의 압량리에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군사훈련을 하였으니 임금이 그 공을 기리어 식읍(食邑) 300호(戶)를 주었다고 한다. 압독국을 대야성(大耶城) 아찬(阿 )으로 옮겼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산군 동면으로 들게 된다.
1914년에 이르러 행정구역을 통합할 적에 압량면으로 개칭하게 되고 면 사무소를 조영동(造永洞)에 두었다가 1916년에 부적동(夫迪洞)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 그림의 눈이랄까. 경산 고을의 가장 오래고 알맹이에 값하는 고장이 바로 압량이다. 압량은 본디 경산군의 본 고장이다. 일본의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전국의 마을 이름을 손질하게 된다 그 때가 1914년의 일이니 오래고 먼 우리들 고향의 정서를 해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인군 서면의 평산, 점촌, 여천, 유곡, 신천, 내동, 남방, 당리, 강서, 백안, 신월, 당음, 가일(駕日)의 13개 마을을 합하였고, 삼한 시절의 압량소국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따다가 압량면이 라 하여 경산군에 들게 한다. 동쪽은 진량읍과 자인면, 남쪽은 남산면과 남천면, 서쪽은 경산읍, 북쪽은 하양과 안심에 닿아 말 그대로 경산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
앞서 경산이란 이름의 말미암음이 갑제라고 하였다. 갑제는 감못이라고도 하는바, 감-거북(龜)신 혹은 물신과 땅신의 상징으로서 신본위사회에서 비롯하였고, 물과 땅을 정성을 가꾸어야 번영한다는 조상의 슬기가 담긴 이정표로 풀이 할 수 있다. 땅이름을 적는 방법의 차이일 뿐 같은 의미로 파악되는 마을 이름들이 있으니 그 보기에 값하는 것이 가일(駕日)의 경우라고 하겠다. 가일이 무슨 연유로 하여 감-가일의 걸림이 보이는가.
우리말을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어다가 적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이두(吏讀)를 들 수 있겠다. 가락(駕洛)의 가(駕)를, 우리말'가마' 혹은 '감'을 적는 한자의 짜맞추기로 보면 가(加)에 마(馬)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가락은 '가마라' 혹은 '감라'라는 말이 된다. 그럼 가일을 '가마일' 또는 '감일'로 읽을 경우 일(日)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일(日)의 옛 소리는 지(jih)였다. 그 때 그 시절 우리말에는 오늘날의 소리틀과는 달라'지'를 '시'로 읽어야한다. 하면 결국 가마일(감일)-가마실(감실)이란 대응이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골(谷)을 실이라고 하였는데 실을 '시'롣 소리내는 것이니 가일(駕日)-가마실(감실)이란 동아리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땅이름에 가마-계로 소리나는 보기들이 약 450여 개나 된다. 농경문화 시기에 섬기던 지모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검(감)'으로 표기되는 거북신앙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옛적의 노래로는 김해지역의 구지가(龜旨歌)-왕거미노래를 들 수 있다. 가일 마을이나 감못밑들은 먹거리 생산의 요람인 점을 보더라도 압량은 주요한 삶의 터전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원적으로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삶의 가능성이란 거의 의미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 물의 중요성을 더 일러 무엇하리오.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하던 압량의 두룩산과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긴 역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들리기 산이라고도 하거니와 산이라기에는 조그만 언덕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다. 여기 두룩 혹은 들리기에서 '둘(들)-'은 압량의 량(粱)이 바뀌어 이루어진 걸로 보면 좋을 것이다. '량'에는 대들보란 뜻도 있는바 과연 압량은 옛부터 경산의 대들보였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압량의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먼저 무문토기(無文土器)를 들 수 있다. 신대리, 부적리, 조영리의 것은 경산시 지역의의 대동의 것과 함께 금호 강변에 이루어진 나즈막한 구릉에 콩이나 항아리 모양의 무문토기 조각이 산발적으로 발견되었다. 1979년 영남대학교 발굴조사단에 따르자면 조영리(造永里) 구릉의 경우, 땅 위에서는 전혀 유적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무문토기 조각이 간혹 나와있다는 작은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발굴했다는 것이다. 땅 아래 이른바 문화층을 발견하였는바, 마제석기(磨製石器)와 대부완두(臺付 豆) 항아리 등 그릇의 모양이 복원되는 무문토기를 수습하였으며 주거지라고 생각되는 유구(遺構)도 나타났으나 특별한 유적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 대구대학교 정호완교수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압독국을 취하여 군(郡)을 두었고 다시 선덕여왕 11년(642)에 김유신 장군이 군주(軍主)로 다스렸던 곳이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둘째 아들이었던 김인문(金仁問)이 총관으로 재임하던 시적 지금의 압량리에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군사훈련을 하였으니 임금이 그 공을 기리어 식읍(食邑) 300호(戶)를 주었다고 한다. 압독국을 대야성(大耶城) 아찬(阿 )으로 옮겼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산군 동면으로 들게 된다.
1914년에 이르러 행정구역을 통합할 적에 압량면으로 개칭하게 되고 면 사무소를 조영동(造永洞)에 두었다가 1916년에 부적동(夫迪洞)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 그림의 눈이랄까. 경산 고을의 가장 오래고 알맹이에 값하는 고장이 바로 압량이다. 압량은 본디 경산군의 본 고장이다. 일본의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전국의 마을 이름을 손질하게 된다 그 때가 1914년의 일이니 오래고 먼 우리들 고향의 정서를 해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인군 서면의 평산, 점촌, 여천, 유곡, 신천, 내동, 남방, 당리, 강서, 백안, 신월, 당음, 가일(駕日)의 13개 마을을 합하였고, 삼한 시절의 압량소국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따다가 압량면이 라 하여 경산군에 들게 한다. 동쪽은 진량읍과 자인면, 남쪽은 남산면과 남천면, 서쪽은 경산읍, 북쪽은 하양과 안심에 닿아 말 그대로 경산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
앞서 경산이란 이름의 말미암음이 갑제라고 하였다. 갑제는 감못이라고도 하는바, 감-거북(龜)신 혹은 물신과 땅신의 상징으로서 신본위사회에서 비롯하였고, 물과 땅을 정성을 가꾸어야 번영한다는 조상의 슬기가 담긴 이정표로 풀이 할 수 있다. 땅이름을 적는 방법의 차이일 뿐 같은 의미로 파악되는 마을 이름들이 있으니 그 보기에 값하는 것이 가일(駕日)의 경우라고 하겠다. 가일이 무슨 연유로 하여 감-가일의 걸림이 보이는가.
우리말을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어다가 적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이두(吏讀)를 들 수 있겠다. 가락(駕洛)의 가(駕)를, 우리말'가마' 혹은 '감'을 적는 한자의 짜맞추기로 보면 가(加)에 마(馬)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가락은 '가마라' 혹은 '감라'라는 말이 된다. 그럼 가일을 '가마일' 또는 '감일'로 읽을 경우 일(日)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일(日)의 옛 소리는 지(jih)였다. 그 때 그 시절 우리말에는 오늘날의 소리틀과는 달라'지'를 '시'로 읽어야한다. 하면 결국 가마일(감일)-가마실(감실)이란 대응이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골(谷)을 실이라고 하였는데 실을 '시'롣 소리내는 것이니 가일(駕日)-가마실(감실)이란 동아리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땅이름에 가마-계로 소리나는 보기들이 약 450여 개나 된다. 농경문화 시기에 섬기던 지모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검(감)'으로 표기되는 거북신앙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옛적의 노래로는 김해지역의 구지가(龜旨歌)-왕거미노래를 들 수 있다. 가일 마을이나 감못밑들은 먹거리 생산의 요람인 점을 보더라도 압량은 주요한 삶의 터전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원적으로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삶의 가능성이란 거의 의미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 물의 중요성을 더 일러 무엇하리오.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하던 압량의 두룩산과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긴 역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들리기 산이라고도 하거니와 산이라기에는 조그만 언덕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다. 여기 두룩 혹은 들리기에서 '둘(들)-'은 압량의 량(粱)이 바뀌어 이루어진 걸로 보면 좋을 것이다. '량'에는 대들보란 뜻도 있는바 과연 압량은 옛부터 경산의 대들보였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압량의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먼저 무문토기(無文土器)를 들 수 있다. 신대리, 부적리, 조영리의 것은 경산시 지역의의 대동의 것과 함께 금호 강변에 이루어진 나즈막한 구릉에 콩이나 항아리 모양의 무문토기 조각이 산발적으로 발견되었다. 1979년 영남대학교 발굴조사단에 따르자면 조영리(造永里) 구릉의 경우, 땅 위에서는 전혀 유적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무문토기 조각이 간혹 나와있다는 작은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발굴했다는 것이다. 땅 아래 이른바 문화층을 발견하였는바, 마제석기(磨製石器)와 대부완두(臺付 豆) 항아리 등 그릇의 모양이 복원되는 무문토기를 수습하였으며 주거지라고 생각되는 유구(遺構)도 나타났으나 특별한 유적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 대구대학교 정호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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