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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문화

빈손 허명 2011. 5. 4. 20:10

시대별문화
삼한시대
기원전 3~4세기경 북만주지방에 부여가 일어나고, 대동강 유역에서 위씨 조선이 활동하던 시기에 한반도 중남부에는
삼한소국이 성립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 후반 위씨조선의 우거왕 때 한강 이남에 위치하였던 진국에서 중국의 한나라에 국서를
보내고 통교를 하였다는 사실이 있으며, 동 108년에는 위씨조선이 멸망함과 동시에 그 자리에 한사군이 진출하였고,
압록강 중류지역에 고구려가 성립되었던 시기에 이미 삼한은 78개의 소국으로 분립되어 있었다.

그 소국 중 경산은 변한과 진한의 중심부에 속하는 압독(량)소국우로 주변에는 남으로 이서고국(청도군), 동북으로
골벌국(영천군), 서북으로 탁순국(대구시)과 경계를 두었고 각기 신지, 험측, 번예, 살혜, 읍차호 불리는 통치자를
중심으로 벼농사를 주업으로 야간의 양잠과 물물교환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활하여 왔다.

BC57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사로소국이 국호를 신라로 고치면서 신라의 국세는 날로 비대하기에 이르렀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고구려·백제가 등장하는 이른바 삼국시대가 개막되었다.

삼한의 소국들은 이들의 신진 세력에 밀려 하나 둘 자치력을 상실, 스스로 신라에 항복함으로 그동안 뿌리 깊게 정착
되어 온 가야 문화권이 서서히 몰락하면서 경산도 오랜 압독의 찬란한 문화가 신라의 새 문화에 흡수되고 만다.
 
신라시대
압독문화가 신라의 새 문화와 융합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갈등과 이질적 현상이 표출 되었으나, 끝내 신라의 강력한
힘에 눌려 나라와 문화를 한꺼번에 잃어야 하는 커다란 희생만 남긴 채 신라에 복속되고 말았다.

신라에 복속된 압독인들은 그 후 삼십년에 걸쳐 주변의 소국들과 합세, 신라에 항쟁하였으나, 결국 잔존한 인접소국
들이 하나 둘 신라의 위세에 눌려 국력을 상실하게 되므로 스스로 반항을 포기하였고, 신라 내물왕(AD356~401)이
경산에 주를 설치하므로 압독국도 어쩔 수 없이 신라의 한 주에 흡수 되고 만다.

선덕여왕 11년에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의 군주로 부임하면서 경산은 신라 삼국통일의 성업을 이룩한 전초기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당시 신라인의 강력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호국불교의 원초기지로 경산의 팔공산이
신라의 삼산 오악 중 한 산으로 포함되는 성지로 자리도움을 하게 되었다.

경덕왕 9년에 와서 압독주가 3개의 현(군)으로 분리되었으나 각기 자치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당분간은 장산군의
영현이 되어 통치를 받았다.

경산은 오랜 역사의 흐름과 같이 하여 빛나는 문화유산과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그중 원효·설총·일연선사는
경산인의 위대한 선인으로 경산의 향토사와 더불어 높이 추앙받고 있다. 이들은 당시 국운융성과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
하여 왔고, 또 신라 삼국통일의 성업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과는 지연을 이룬 고장으로, 지형적으로 압량주의 서북으로는
팔공산, 동으로는 구룡산, 남으로는 삼성산·대덕산을 요새로 한 군사 요충지로, 이 곳에 훈련장을 축조하여 양성하였던
병사들이 백제·고구려와의 격전에 직접 참전하게 되었으므로, 경산은 당시 삼국통일의 결정적 승전기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이는 태종무열왕이 직접 자신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압독의 총관으로 임명, 장산성을 쌓게하였음을 보아도 이를 집작
할 수 있다.

결국, 김유신은 경산에 세 곳의 화랑연무장을 남겼고, 원효대사는 팔공산 곳곳에 성지를 남겼으며, 설총 또한
그 출생기는 원효대사와 같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이두문을 집대성한 신라10현에 속하는 유학자이며, 일연선사는  현대사에서 상고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인 삼국유사를 남겼고, 단군연호를 최초로 활용하는데 큰 동기를 부여한 문학가이며, 불교 사상가로 그의 도와 학문을 고려조정에서 인정, 그가 열반한지 28년 뒤인 서기1317년에 충숙왕이 친히 경산이 일연의 고향이라 하여 당시 경주부에 속현되어 있던 경산(경산)을 현으로 승격 시킨바 있다.
 
고려시대
그 후 1389년에 고려 제34대 왕으로 즉위한 공양왕의 왕비 노씨(순비노씨)도 고향이 경산인으로 1391년(공양왕 3년)에는 경산을 왕비의 고향이라하여 군으로 승격 시킨바있다.
 
조선시대
조선조에 와서는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이 정착되면서 지방선비의 대거 중앙등용 기회가 확대되었고, 이 지방
또한 많은 인재가 등용되어 경산발전에 기여하여 왔다.
 
문헌
삼국사기 권제1 파사왕조』에는 파사왕(니사금) 23(AD102년)에 음집벌국(지금의 월성군 안강으로 추정)과
실질국(지금의 삼척지방 추정)이 압독국과 같이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삼국사기 권34, 잡기지리조』
에는 압량(압독)국이 신라에 병합된 뒤 장산(장산)으로 칭하여 졌다는 기록과 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 이곳에
주를 설치한 후 김유신을 군주로 파견하고 이후 김인문을 압량주 총관으로 임명, 장산성을 구축케 하였다는 기록 등을
미루어 보아 경산이 신라가 삼국통일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대적 분류
  • 삼한시대
  • - 변진(弁辰)의 일국인 압량소국(押梁小國), 일명 압독국(押督國)
     
  • 신라시대
  • - 파사왕 23년(서기 102) 신라에 합병
    - 선덕여왕 11년(서기 642) 압량주 설치
    - 경덕왕 9년(서기 750) 1군 2현 설치
     
    - 경산소재지권->장산군
    - 하양권->하주,화성현
    - 자인권->노사화,인산현
     
  • 고려시대
  • - 태조 23년(서기 940) 군이 현으로 강등->장산현
    - 현종 9년(서기 1018) 장산,하양현이 경주부에, 자인현이 안동부에 속현
    - 충숙왕4년(서기 1317) 국사 일연의 고향이라하여 복현
    - 공양왕3년(서기 1391) 왕비 순비노씨의 고향이라하여 군으로 승격
     
  • 조선시대
  • - 태조 4년(서기1395) 경산군이 다시 현으로 강등
    - 선조 34년(서기 1601) 하양현이 경주부에서 대구부에 속현
    - 선조 40년(서기 1607) 하양 복현
    - 인조 15년(서기 1637) 자인 복현
    - 고종 32년(서기 1895) 경산, 하양, 자인현이 군으로 승격
     
  • 근대
  • - 1914. 하양, 자인 2개군과 신령군 남면 일부 경산군에 병합
    - 1956. 7.1 용성면에서 육동출장소 설치(군조례108호)
    - 1981. 7.1 안심읍 고산면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법률3424호) 2읍 7면 1출장소
    - 1986.12.1 육동출장소 폐지(군조례 1008호)
    - 1989. 1.1 경산읍이 시로 승격, 경산군은 1읍7면으로 행정구역 조정(법률 제 4050호)
    - 1995. 1.1 경산시,군 통합(법률 제 47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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